주식 펀드 매니저로 일하던 시절, 미국 여행 중 LA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살던 곳은 수영장과 자쿠지가 있고 조경과 시설 관리도 잘 되어 있는 꽤 근사한 아파트였습니다. 친구도 보안이 잘되어 있고, 입주하려면 개인 신용도도 어느 정도 높아야 한다며 꽤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자연스럽게 가격이 궁금해졌습니다. “이 정도 아파트면 한 채에 얼마나 해?”
그런데 친구의 대답은 조금 뜻밖이었습니다. 이 아파트는 우리나라 아파트처럼 세대별로 소유주가 따로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전체를 하나의 회사가 소유하고 있었고, 친구를 포함한 주민들은 모두 그 회사에 월세를 내고 살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직업병이 발동했습니다. 펀드 매니저라는 직업의 특성상 그 아파트를 소유한 회사가 궁금해졌고, 찾아보니 Essex Property Trust라는 미국 서부의 아파트를 대규모로 보유한 상장 리츠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배당주 투자를 담당하고 있던 제 눈에 정작 들어온 것은 멋진 아파트도, 높은 임대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Essex의 수십 년간 지속된 배당금 상승이었습니다.
Essex Property Trust 배당금 추이자료 = Essex Property Trust 2026 1Q IR 자료Essex는 현재 32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배당금을 올린 이른바 ‘배당귀족주(Dividend Aristocrat)’입니다. 1994년 IPO 이후 올해 1분기까지 배당금은 5.2배 상승하였는데, 꾸준한 배당성장에 따라 배당과 주식 수익을 합산한 누적 총수익률은 +5,148%에 이릅니다.
배당귀족이라는 표현이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 S&P500 Dividend Aristocrats의 경우 최소 25년 연속으로 매년 배당금을 늘린 기업만 편입될 수 있습니다. S&P 500에 속할 정도의 우량 기업 가운데서도 2025년 초 기준 이 조건을 충족했던 회사는 69개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현재 국내 상장기업 중 이를 충족하는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25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깁니다. 그 사이 닷컴버블도 있었고, 글로벌 금융위기도 있었으며, 코로나19도 찾아왔습니다. 금리가 급등하기도 하고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한 번도 배당금을 줄이지 않고 오히려 매년 더 지급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배당을 많이 주는 회사’라는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여러 번의 위기를 견뎌낼 만큼 안정적이었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은 당시 제가 기획하고 있던 글로벌 배당성장 펀드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배당을 꾸준히 성장시키는 기업을 찾다 보니 오히려 장기간 안정적인 임대료를 만들어내는 리츠라는 자산군이 눈에 들어왔고, 결국 글로벌 리츠 펀드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리츠를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펀드 매니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 리츠를 살펴보다 오래전 Essex를 처음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회사를 영국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영국의 배당귀족 리츠Primary Health Properties는 이름 그대로 병원 부동산을 보유하는 영국 리츠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대형 종합병원보다는 영국 사람들이 집 근처에서 가장 먼저 찾아가는 GP(General Practitioner) 진료소와 지역 의료센터가 핵심 자산입니다. 자료 = Primary Health Properties 2026 상반기 보고서
그리고 PHP는 2026년까지 30년 연속으로 배당금을 인상했습니다. 미국식 배당귀족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 본다면 이미 충분히 ‘배당귀족’이라고 부를 만한 기록입니다. 현재 영국과 아일랜드에 1,140개의 의료시설, 약 60억 파운드 규모의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병원에 건물을 임대해주는 회사는 어떻게 30년 동안 한 번도 배당 성장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임차인은 GP지만, 임대료의 뒤에는 정부의 NHS가 있다영국 의료제도의 중심에는 NHS(National Health Service)가 있습니다. 세금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공공 의료제도로, 기본 원칙은 필요에 따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환자가 진료 현장에서 직접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국,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대부분의 환자가 아프다고 바로 대형병원을 가기보다 집 근처의 GP를 먼저 방문합니다. GP가 일종의 주치의이자 의료시스템의 첫 번째 관문 역할을 합니다. GP 선에서 치료할 수 있으면 그곳에서 진료를 끝내고,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GP의 의뢰를 통해 상급병원이나 전문의에게 넘어갑니다. 응급진료 등 일부 예외가 있지만 NHS 내 전문진료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거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GP들은 모두 NHS가 직접 고용한 공무원 의사가 아닙니다. 상당수 GP practice는 NHS와 계약을 맺고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독립적인 사업자 또는 파트너십 형태로 운영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용하는 병원 건물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이 직접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PHP 같은 전문 부동산 회사로부터 임차합니다.
즉, 구조를 단순화하면 이렇습니다. 자료 = ChatGPT 생성이미지
2025년 말 기준 PHP 포트폴리오 임대수익의 약 76%가 정부 지원 성격이었고, 점유율은 99%, 평균 잔여임대기간(WAULT)은 약 11년에 달했습니다. 민간 기업을 임차인으로 두는 일반적인 오피스나 물류센터와 비교하면 사실상 최상급의 임차인 신용도를 가진 셈입니다.
고령화가 만드는 가장 예측하기 쉬운 수요임차인의 신용도가 좋다고 해서 부동산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 건물을 계속 사용할 수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료 수요에는 다른 부동산과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오피스 수요는 재택근무가 늘어나면 줄어들 수 있고, 쇼핑센터는 온라인 쇼핑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호텔은 경기침체가 오면 여행객이 감소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의료서비스를 이용해야 할 가능성은 오히려 높아집니다.
그리고 영국 역시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영국 통계청 ONS의 최신 인구 전망에 따르면 2024년 약 1.75백만 명이던 85세 이상 인구는 2049년 약 3.6백만 명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날 전망입니다. 연금수급연령 인구 역시 같은 기간 12.4백만 명에서 15.3백만 명으로 약 24%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고령화 자체만으로 어떤 기업의 실적이 자동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료 부동산의 입장에서 보면 향후 수십 년 동안 수요가 갑자기 사라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투자 포인트입니다.
대형병원에서 지역 의료센터로, 영국 의료시스템의 변화최근 PHP에 더 흥미로운 변화가 하나 생기고 있습니다. 단순히 의료 수요가 늘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국 정부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소 자체를 바꾸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영국 정부가 발표한 ‘10 Year Health Plan’의 가장 첫 번째 정책 방향은 매우 명확합니다.
대형 병원에 환자가 몰린 뒤 비싼 의료자원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가능하면 지역 의료센터에서 환자를 먼저 치료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향후 대형 병원 진료에 들어가는 지출 비중을 낮추는 대신 지역의료센터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장기적으로는 모든 지역에 지역의료센터를 구축한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GP 숫자를 조금 늘리는 정책과는 다릅니다.
기존 영국의 1차 의료시설 상당수는 매우 오래됐습니다. Savills가 영국 의료시설 자료를 정리한 결과 2022년 기준 약 20%의 Primary care 시설이 NHS가 출범한 1948년보다도 전에 지어졌고, GP가 사용하는 시설 가운데 22% 이상이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됐습니다.
과거의 GP가 작은 건물이나 오래된 지역 진료소에서 의사 몇 명이 진료하는 형태였다면, 앞으로의 시설은 점점 달라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GP 진료소 3곳을 통합해 만든 신축 지역의료센터 사례자료 = PHP IR 자료
새로운 지역의료센터에는 여러 명의 GP뿐 아니라 간호사, 약사, 물리치료사, 정신건강 전문가와 각종 지역 의료서비스가 한 건물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기존의 작은 GP가 보다 큰 규모의 지역 종합 1차 의료시설로 현대화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PHP 같은 대형 전문 임대 사업자에게 유리합니다. 소규모 상가 규모의 자산을 보유한 개인 건물주와 달리 PHP는 전국에 1,100개가 넘는 의료자산을 운영합니다. 어느 지역에 어떤 규모의 시설이 필요한지 알고 있고, 기존 건물을 증축하거나 리모델링하고, GP·NHS와 장기 임대차를 다시 체결하는 경험도 축적돼 있습니다.
의료시설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질수록 단순 영세 임대사업자보다는 개발, 자금조달 능력, 운영 경험을 갖춘 전문 플랫폼의 경쟁력이 높아지는 구조입니다. PHP 역시 확장, 리노베이션 같은 자산 운용 역량을 핵심 성장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인구 구조적 성장누구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30년의 기록이 앞으로의 30년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영국의 고령화는 의료 수요의 구조적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고, 정부 역시 대형병원보다 지역사회와 1차 의료시설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 차례의 위기를 거치면서도 30여 년간 꾸준히 성장하고 배당을 늘려온 PHP의 역량을 더해보면, 앞으로도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갈 가능성은 충분히 기대해볼 만합니다. 지금의 흐름이 이어진다면, 20년 뒤에는 50년 이상 연속으로 배당을 늘린 기업을 뜻하는 ‘배당킹(Dividend King)’의 반열에 오르는 모습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