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지어놓으면 팔리는 시대, 투자하면 수익을 보장받는 시대가 아닙니다. 실제 미분양 주택, 상가 등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시티&은 이런 변화의 시대에 부동산 사업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고객의 마음을 설계합니다. 변화하는 부동산 사업 기획 프로세스' 시리즈를 통해 단순한 상권 분석이 아닌 고객 중심, 사람의 라이프에 맞춰진 관점으로 부동산 사업을 다시 점검할 수 있는 인사이트를 공유합니다.
부동산 입지의 가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대중교통이 편리하거나 도로망이 좋은 입지일수록 상대적으로 높은 가치를 갖죠.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은 부동산이 높은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역세권’처럼 도심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시점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치 있는 부동산의 입지가 과연 가까운 미래에도 유효할지는 고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보편적인 기준에서부동산의 입지를 결정하는 시대에는 단순한 ‘물리적 접근성(Physical Accessibility)’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양화된 산업과 개인의 개성이 중요한 시대로 변화할수록 더 많은 요소들이 입지의 가치를 정하고 있죠. 예를 들면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인 ‘심리적 접근성(Psychological Accessibility)’도 입지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입지의 변화는 수많은 요인에서 비롯됩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재택근무가 활성화되면서 직주 근접의 개념이 바뀌었습니다. 전동자전거와 전동킥보드 같은 공유 이동 수단의 보편화는 접근성과 교통수단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죠. 또한 온라인 쇼핑의 확산과 배달 서비스의 발전으로 생활 편의시설의 입지가 더 이상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게 되었고, 고속 광역철도망이 확충되면서 도심과의 거리 개념도 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자율주행과 드론 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공급 가능한 지역과 물건’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부동산 공급자의 입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반대로소비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 속에 잠재되어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도시와 공간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생활 방식에 맞춰 유연하게 설계되어야 하며, 물리적•심리적 접근성을 균형 있게 고려한 계획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산업의 발전과 함께 변화되어 온 입지
가치 있는 부동산 입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은 산업과 함께 발전했습니다. 최초의 입지론은 농업에서 출발하였고, 공업의 입지를 거쳐현대에는 서비스 산업과 심리적 요인까지 고려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1) 1차 산업 중심의 농업입지론
19세기 초반, 폰 튀넨(J.H. von Thünen, 1826)은 고립국이론1을 제시하며 농업지대의 배열은 도시를 중심으로 운송비의 차이에 따라 동심원의 형태로 배열된다고 하였습니다. 교통비를 최소화해야 하는 활동일수록 도시의 중심지에 가깝게 입지한다는 것이죠. 이에 따라 도시 중심지는 접근성의 이점으로 인해 지가가 높게 형성된다고 설명했습니다2.
하지만 현재는 식품 가공 기술의 발전과 도로 및 냉장 유통의 발달로 중심지와의 접근성이 가치 있는 농업의 입지를 설명하는 변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기후, 토양조건, 기술의 발전과 지속 가능성과 같은 변수들이 농업의 입지를 결정하는데 더 중요한 요인으로 설명되고 있죠.
농업 중심 사회에서 공업 중심의 사회로 변화함에 따라 베버(A. Weber, 1909)의 공업 입지론이 등장했습니다. 공업의 입지를 결정하는 요소는 생산비(운송비, 노동비, 원료비)이며, 이를 최소화하는 곳이 가장 효율적인 입지라고 설명했죠.이는 농업입지론과 동일하게 지리학과 경제학을 접목3시켰지만 아직은 수요자의 입장이 아닌 공급자의 입장에서 입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현대에는 정보통신기술과 글로벌 공급망이 확대되면서 운송비, 노동비, 원료비뿐만 아니라 각 국가별 노동력의 질, 정부의 정책, 기술의 발전도 등이 공업의 입지를 결정하는데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3) 3차 산업 중심의 상업입지론
수요 중심 경제로 전환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입지를 결정하는 데 소비자들의 역할이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은 중심지 이론을 통해 상업지의 입지를 설명한 크리스탈러(W. Christaller, 1933)였습니다. 그는 소비자가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기 위해 이동하는 최대의 거리(상품의 도달 범위)가 특정 점포가 일정 지역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구매력 수준(최소요구치)보다 커야 점포가 생존할 수 있다고 설명4했습니다. 이렇게 정해진 상권의 범위와 입지는 과거 공급자 위주의 입지론에서 벗어나 수요자와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산업을 중심으로 설명한 입지론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의 주거를 중심으로 설명한 입지론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도시와 인간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 생태학적 관점에서는 소득수준과 접근성에 따라 주거지가 나뉘며, 사람들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동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동은 일정한 공간적 패턴을 따른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도시 경제학적 관점도 입지의 가치는 수많은 상호작용에 따라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도심과의 거리, 지불 가능한 지대, 교통 접근성에 따라 주거지가 형성되며, 교통비와 주거비 간의 균형 속에서 사람들이 최적의 거주지를 선택한다고 설명하죠. 개인의 인생인 결혼, 출산, 은퇴 등의 단계에 따라 주거의 수요와 이동이 변화한다는 생애주기 모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동산의 입지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산업의 발전, 경제적 요인, 사회적 관계, 개인의 삶의 변화 등에 따라 끊임없이 재편성되고, 여러 상호작용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내부구조를 설명한 동심원이론(E.W.Burgess, 위쪽)과 선형이론(H.Hoyt, 아래쪽) ⓒplanningtank
입지에 대한 패러다임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입지의 가치는 도시의 중심을 기준으로 몇 가지의 고정된 항목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부동산 광고에 나오는 고정 문구를 보면 ‘서울까지 몇 분 거리, 더블 역세권’ 등 어디에나 비슷한 요소들이 동일하게 반복되며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편적인 입지의 기준은 가속화되는 개인의 세분화에 따라 더 빠르게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보편적인 생산을 위한 물리적 편리함에서 벗어나 생활 편의성, 주거와 일자리의 균형, 심리적 접근성, 휴식과 같은 수많은 요소들이 입지를 결정하고 있죠.
프랑스의 카를로스 모레노(Carlos Moreno, 2016)가 제안한 ‘15분 도시(La ville du quart d’heure)’ 개념은 이러한 입지의 변화를 반영하는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차량 접근성이 아닌 도보 또는 자전거를 이용하여 주거지로부터 15분 이내에 일자리, 교육, 소비, 문화, 여가, 의료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도시 구조입니다. 기존의 도시 이론이 한 개의 중심지를 기준으로 도시를 설명하였다면 15분 도시에는 수많은 다중심지가 필요하며, 물리적인 경계를 허물고자 합니다. 이는 차량 접근성에 따라 계층을 이루는 과거의 도시 설계 방식에서 벗어나 근거리 생활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도시 모델6이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40 서울도시기본계획에 ‘도보 30분 이내에 다양한 활동을 누리는 보행일상권’으로 반영7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산, 제주 등 다른 지방자치단체들도 이를 도입하고 있죠.
15분 이내의 보행거리 내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시 기능을 제공한다는 개념은 이동 시간을 줄여 주거의 질을 높이고, 탄소 배출 감소를 통해 친환경적인 도시 환경을 조성하며, 생활권 내 소비 증가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도시가 도보 15분 이내에 모든 시설이 입지해야 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각 도시의 지역 주민이 자주 사용하는 서비스에 따라 그 시설의 위치는 다르게 설정9되어야 하죠. 즉, 기존 도시의 틀을 깨고 도시를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생각해야 하며 그 중심에는 도시의 사용자가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는 이 개념을 적극 도입하여 건물 또는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시간에 따라 바뀔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예를 들면 학교를 열어서 주민의 놀이터와 휴식 공간으로 이용하거나 공원에 이동형 놀이동산을 설치하여 어린이들의 도시 참여 활동을 높이기도 합니다. 또한 야외 주차장에 식당 테이블을 배치하기도 하며, 주말이면 도로에 시장을 열기도 합니다. 그뿐만아니라 활동적인 거리 조성을 위해서 소매점 또는 상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에게 건물 1층의 분양 우선권을 주기도 합니다.10
물론, 15분 도시가 모든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대적인 모델은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도시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11. 그러나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은 변하지 않고 명확합니다. 사람들의 삶의 형태와 함께 도시 내 부동산이 가진 입지의 가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부동산 개발을 하는 입장에서도 과거의 선입견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사람들의 삶과 트렌드 변화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 우선 될 필요가 있습니다.
부동산 개발과 기획의 중심은 사람들이 ‘어디를 살(buy) 것인가?’에서 이제는 ‘어떻게 살(life) 것인가?’를 파악해야 하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개발은 단순히 현재 유용한 입지를 선정하고 공간을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객의 삶의 방식(Lifestyle)을 기획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주거뿐만 아니라 상업 공간 역시 과거의 가치관을 넘어 소비자들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 어떤 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해줄 것인가를 중심적으로 고민하고 설계해야 합니다. 이렇듯 부동산 개발자에게는 공간을 공급하는 주체가 아니라 고객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수많은 요인들을 균형 있게 디자인하는 마에스트로(Maestro)의 역할이 요구됩니다. 결국 ‘어디에서 어떻게 살(life) 것인가?’에 대한 고객들의 물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해답을 찾아주는 것이 도시와 부동산을 개발하는 우리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참고 자료] 1 고립국이론(Von Thünen’s Isolated State)은 운송비와 시장 접근성이 농업의 입지를 결정한다는 개념임. 도시 중심부 주변에는 수확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집약적으로 경작하는 윤재식 농업이 주를 이루지만,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토지의 집약도가 낮아지는 농업이 분포하게 됨. 2 권호근·장민영, “부동산입지의 이론적 고찰”, 부동산경영 제8권, 2013, pp.75-102. 3 형기주, “알프레드 베버의 공업입지론”, 국토연구원, 공간이론의 산책 3, 1997.05.15 4 권호근·장민영, “부동산입지의 이론적 고찰”, 부동산경영 제8권, 2013, pp.75-102. 5 이형상, "아산시의 도시내부구조 연구." 공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내 그림 참조하여 재구성 6 카를로스 모레노, “도시에 살 권리 세계도시에서 15분 도시로”. 정예씨, 2023. 내용 중 일부 발췌하여 정리 7 이성근·최민아, “파리 15분 도시계획과 2040 서울도시기본계획의 보행생활권 계획 특성 비교”. 프랑스문화연구. 제58권 제1호, 한국프랑스문화학회, 2023, pp73-97 8 박창석, “[탄소중립 도시] 파리의 15분 도시, 미래의 삶을 꿈꾸다”, 한국개발연구원, 2022. 내 그림인용 9 허자연, “15분 도시: 사용자 중심의 도시를 만드는 방법”. 국토 제515호, 국토연구원, 2024.09, pp70-72 10 유무종, “파리, 15분 도시계획과 도시시설 활용 방안 발표”. 건축과 도시공간. 제40권, 겨울호 2020, pp76-77 11 이용균, "15분 도시’의 핵심 개념과 실천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도시지리학회지 제27권 제3호, 2024, pp31-44.
조훈희
부동산 개발/컨설팅사 대표. 부동산학 박사
부동산과 콘텐츠를 결합한 다양한 개발을 합니다.
현) (주)투에이치파트너스 대표. 한양대학교 부동산융합대학원 겸임교수. 전) 현대캐피탈, 코람코자산운용, CBRE Korea 근무. 저서로는 <아빠, 부동산이 뭐예요?>, <부동산 투자, 농사짓듯 하라>, <밥벌이의 이로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