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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눈을 뜹니다. 눈뜨자마자 뉴스 확인 후 아침 운동을 마치고 간단한 식삿거리를 챙겨 회사에 도착하면 7시 반. 그나마 지금은 팀원을 두고 일하는 덕에 내 몸에 투자하는 시간도 누립니다. 회사에 도착하면 팀원이 정리한 블룸버그 요약자료를 꼼꼼히 체크하고 환율, 밤사이 미국 증시 동향 등을 확인합니다. 금주 만기가 도래하는 상품을 보유한 고객들의 수익률 상황 점검이 끝나면 최근 증시 흐름을 고려한 상품 운용 전략을 점검합니다.
일련의 과정은 아무리 길어져도 업무 시작 전인 8시 40분을 넘기지 않습니다. 이어 고객에게 오늘 예정된 미팅 일정을 확정하는 문자를 보내고, 업무가 누락되거나 중복되지 않도록 팀원들의 업무 내용을 다시 확인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홍콩에서 들어온 고객과 투자 검토 중인 부동산 임장을 가는 날이라 오전 업무가 더 분주합니다.
자산관리전문가는 고객의 자산 관리와 개인적 영역까지 다양하게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cerulli.com 
초침이 9시를 넘으면 긴장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30여 년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여전히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메일을 열어보니 본사의 지시사항, 자산운용사와 보험사 등의 시장 전망 및 상품 안내장 메일이 빼곡합니다. 그중에서도 미국에 있는 고객의 문의사항과 지점에 거의 오지 않고 비대면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젊은 사업가 고객의 메일을 먼저 열고 처리합니다.
지난달 자산운용 중간보고에 대한 고객 의견을 듣고 상품 전략을 바꾸는 리밸런싱(Rebalancing. 자산 포트폴리오 관리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서 변동된 자산 비율을 목표 비율로 재조정하는 것을 의미) 수락 및 보완 요청을 합니다. 즉시 답변이 가능한 것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을 나눠 향후 업무 처리 과정 및 예상 소요 시간 등을 간단하게 정리해 답변 메일을 보냅니다.
핸드폰 문자와 카카오톡에 아직 읽지 못한 고객의 요청사항이 쌓여 있고, 부고 등 경조사 관련 문자가 실시간으로 날라옵니다. 9시 반을 넘으면 전화벨도 쉬지 않고 울립니다. 고객 전화와 증시 변동 상황에 정신없는 가운데 책상머리에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옵니다. P 고객의 미국 유학 중인 자녀 인턴십 소개, J 고객 아들 혼처 주선… 
국내 증권사 WM(Wealth Management) 영업 담당 상무의 아침입니다. 30여 년간 늘 분주하게 아침을 살아내는 그의 이력은 PB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인상도 말투도 둥글둥글해졌지만, 변함없이 긴장감 높은 하루를 보냅니다. 아마 이런 업무 루틴이 그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힘인가 봅니다.

PB, 부자 고객 자산과 집안까지 관리하는 집사
미국은 PB 3만여명으로 가장 방대, 싱가포르 급성장 중

PB(Private Banker)는 고객의 자산을 관리하는 금융 전문가이자, ‘집사’의 역할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자산을 관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그 집의 가족관계와 사업, 그 너머의 많은 것을 알게 될 수밖에 없는 위치입니다. PB를 자산관리전문가이자 집사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고액 자산가가 빠르게 늘면서 국내 자산관리 산업도 팽창 중입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프라이빗 뱅킹 시장을 보유한 미국은 약 20,000~30,000명의 PB가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국의 주요 은행(JP Morgan, Goldman Sachs, Morgan Stanley, Bank of America, Wells Fargo 등)과 독립 자산관리회사들은 대규모 PB 조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Cerulli Associates의 시장 조사 보고서에 미국 내 자산관리 전문가 인력에 대한 통계가 제공되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은 공식적으로 PB 인력풀에 대한 기준과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PB 숫자는 약 8,000~10,000명 정도입니다. 초고액자산가(UHMWI)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자산관리 문화가 미국만큼 발달하지 않은 일본이지만 최근 노무라, 미쓰비시UFJ, 미즈호 등 주요 금융그룹을 중심으로 PB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홍콩은 아시아 금융허브 답게 약 5,000~7,000명 정도의 PB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HSBC, UBS, Credit Suisse, 중국계 은행들을 중심으로 중국 본토와 아시아 지역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PB 서비스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최근 몇 년간 홍콩의 정치적 불안정에 따른 아시아 부유층 자산과 금융 인력이 빠르게 유입되면서 급격히 PB 산업이 성장하고 있는 곳입니다. 싱가포르의 PB 숫자는 약 3,000~4,000명으로, 글로벌 주요 은행과 대부분의 아시아 주요 금융사들이 진출해 있습니다. 향후 아시아에서 패밀리 오피스 시장이 급격하게 팽창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더욱 역할이 확대될 것으로 보입니다. 

2000년대 중반 국내 자산관리서비스 본격 확대
국내 PB 5천여명 내외, 자격 기준 금융사별 상이

우리나라의 PB 제도는 외환위기 이후 금융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시티은행이 'Citi gold'라는 서비스를 국내 최초로 선보인 이후, 2000년대 초반부터 국내 시중은행들이 경쟁적으로 PB 서비스를 도입하기 시작했죠. 초기에는 주로 고액 자산가에게 차별화된 서비스와 우대금리를 제공하는 단순한 형태였으나, 점차 그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한국 시장에서 고액자산가의 수와 자산이 꾸준히 증가하며 PB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2000년대 중반에 와서야 본격적인 틀을 갖추고 PB 영업이 활성화됩니다. 이때부터 국내 금융기관들이 경쟁적으로 PB 센터를 설립하고, 증권사들도 자산관리 사업에 적극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PB 전문인력양성과 자격증 제도도 도입되었으며, 단순 예금 및 펀드 판매에서 종합 자산관리 개념으로 서비스 범위가 확장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활동 중인 PB가 어느 정도 될까요? 금융사별로 PB의 자격 및 기준 요건에 차이가 있지만 대략 5,000~6,000명으로 예상됩니다. PB 숫자에 대한 정확한 집계가 어려운 이유는 PB 자격 기준이 금융사별로 다르게 관리 운용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산을 관리하는 PB가 되기 위해 AFPF(Associate Financial Planner Korea)나 CFP (Certified Financial Planner) 등 자산관리전문가 자격증 취득 후 실무에서 경력 및 교육을 이수하여 자산관리 전문성을 쌓아가야 합니다. 세부적으로 금융사별 로드맵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금융사들이 고액 자산가 영업을 통해 수익성을 높이는 것에 치중해 과열 경쟁을 한 나머지 자산관리전문가로서 PB의 역할은 오히려 퇴색된 느낌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은행 영업점의 감소 추세와 달리 PB 센터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고객 자산을 관리하는 집사 PB,

전문성과 신뢰로 글로벌 경쟁 시대 준비해야

PB는 고객의 자산을 관리하는 전문가로 확정금리 상품인 예∙적금 외에도 다양한 상품 권유 판매를 통해 시장 벤치마크 이상의 수익을 실현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금융상품 판매에 따른 수수료는 금융사나 PB 자신의 수익이나 평가지표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자산관리전문가로서 기본 지식을 이수하고 자격 검증을 통해 부여받는 AFPF나 CFP 자격증보다 상품 판매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펀드투자상담사, 증권투자상담사, 파생상품투자상담사, 보험판매 자격증이 훨씬 더 중요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상품 판매 자격증은 필요조건이고, 자산관리전문가 자격증은 충분조건인 셈이죠.
주요 시중은행에서 제공하고 있는 PB 서비스 소개 ⓒKB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금융권의 PB 평가 지표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신규 고객 유치 수나 고객의 자산운용 수익률, 고객만족도 등이 활용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명확한 지표는 얼마나 회사 손익에 기여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상품 판매 수익의 숫자가 PB의 성과로 직결되는 구조에서 가끔은 고객의 이익이 뒷전으로 밀리기도 하죠. 금융사 직원들끼리 심심치 않게 주고받는 농담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PB들의 핵심성과지표인 KPI(Key Performance Indicator)에 ‘남북통일을 넣으면 아마 달성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요. 우리나라 PB 서비스의 질적 발전과 자산관리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PB 평가 기준이 금융회사가 아닌 고객 관점에서 재정립돼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입니다.
안명숙

안명숙

서울프라퍼티인사이트 자문위원. 부동산 마케팅 솔루션제작소 오지랖 대표

30여년 경력의 현직 부동산 자산관리 전문가. 금융권 부동산 컨설턴트,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 스타트업 기업 등을 거치면서 세대를 아우르는 부자들의 관심과 니즈를 분석해왔다. 부동산이 도시와 개인의 가치있는 자산으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하도록 오늘도 유쾌하게 오지랖을 떨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