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조금 벗어나 간사이 제1의 도시 오사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오사카는 도쿄에서 자란 필자에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거주하는 사람들의 성격도 다르고, 지금까지 소개한 지역과 문화적 차이도 분명합니다. 인터넷과 교통망의 발달과 함께 도쿄와 오사카의 차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음식, 문화, 엔터테인먼트, 역사적 건축물까지 다른 점을 꼽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렇게 도쿄에 뒤지지 않는 특징을 가진 오사카는 2025년 현재 세계 박람회 개최지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때 처음 오사카를 방문했던 경험이 있던 지라 오사카의 변화에 더욱 관심이 갑니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당시 오사카라는 도시는 매우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발전한 도시임을 바로 느낄 수 있었죠. 여행의 목적은 박람회였지만, 마음 깊은 기대감은 오사카의 철도, 특히 사철(민영 철도)을 타보는 것이었습니다. 철도를 좋아하던 어린아이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죠.
오사카 엑스포 2025의 상징물인 목조 건축물 '그랜드 링' ⒸOBAYASHI CORPORATION, 오사카 Expo 2025 홈페이지
이번 아티클을 통해 오사카와 도쿄의 도시 발전이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오사카의 발전을 지탱해 온 철도와 오사카 터미널 역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도쿄와 오사카의 도시 발전에 있어 역사적인 차이부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도쿄 VS 오사카, 어떤 발전사의 차이를 보이는가
도쿄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개척한 도시로, 당시에는 에도라고 불렸으며 갈대밭이 무성한 습지가 펼쳐진 미개척지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일본의 정치 중심지는 일본 서쪽에 위치한 나라나 교토였지만, 에도를 개척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장들의 수장인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정치적 중심이 점차 교토에서 에도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역사 속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도시로 분류됩니다.
이에 반해 오사카의 역사는 오래되었습니다. 오사카라는 도시는 최소 1500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고대의 오사카는 난바쓰라고 불리는 훌륭한 항구가 있어 한반도, 중국 대륙과의 무역 거점으로 번성했습니다. 667년에는 이곳에 수도가 설치되기도 했으며 이후 아스카쿄, 후지와라쿄, 헤이조쿄, 나가오카쿄, 헤이안쿄 등 여러 번의 천도도 기본적으로는 이 항구 주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그 중요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후 오사카는 난바에서 북쪽 방향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오사카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1603년~1867년)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오사카성과 그 아래 마을은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한 차례 불에 탔지만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재건되었고, 상업 도시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무역의 거점으로서 전국 각지의 쌀과 특산물이 오사카에 집결되었고, ‘쿠라야시키(蔵屋敷)’라 불리는 창고형 시설이 다수 건설되었습니다. 쿠라야시키는 다이묘나 하타모토 등 영지를 가진 무사들이 연공미나 영지의 특산물을 판매해 현금화하기 위해 만든 창고 겸 관청 기능의 시설입니다. 이러한 물자들은 오사카의 시장에서 거래되어 전국으로 유통되었습니다. 특히 도지마 쌀 시장에서는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 제도가 탄생했으며,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이라 불리며 일본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창고형 건축 시설인 '쿠라야시키'의 일반적인 형태. 사진은 현재 오사카시립미술관의 남문으로 그 쓰임이 달라진 쿠라야시키 ⒸWikimedia Commons, bittercup
이처럼 중세 일본에는 경제의 중심지인 오사카와 정치의 중심지인 에도, 두 개의 대도시가 탄생했습니다. 에도는 도쿠가와 쇼군이 거주하는 에도성을 중심으로 번성한 도시로,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다이묘들이 산킨코타이(참근교대) 제도에 따라 일정 기간을 에도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무사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다수의 무사와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한 소비가 활발했습니다. 그로 인해 오사카에서 많은 물자가 운반되어 오는 ‘소비지’로서의 역할이 강했던 것입니다. 이후 인구가 증가한 에도는 오사카에서 운반되어 오는 물자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고, 점차 가와고에를 비롯한 에도 근교 도시들도 정비되었습니다.
대오사카 시대를 거치며 발전과 쇠퇴를 반복
「천하의 부엌」으로 번성했던 오사카지만, 에도 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유신을 맞으면서 그 경제적 기반이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에도 막부나 다이묘가 영지를 관리하던 번(藩) 제도가 폐지되는 등 정치 체제에 변화가 생기고 정치·행정·경제의 중심이 도쿄로 일원화되면서, 번의 재정을 지탱하던 쿠라야시키(蔵屋敷)나 쌀 거래의 중심이던 도지마쌀회소(堂島米会所)가 폐지되어, 오사카 경제의 주요 기둥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각 번에 자금을 대출해 주던 환전상(両替商)은 번의 해체와 함께 막대한 대출금을 회수할 수 없게 되어 잇따라 도산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오사카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강인한 오사카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오사카는 상공업의 중심지로 다시 한번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특히 1890년대 이후에는 섬유 산업이 활기를 띠며 ‘동양의 맨체스터’라 불릴 정도의 공업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1925년경부터는 간토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고 쇠퇴한 도쿄를 제치고, 오사카시는 주변 마을들과의 합병 등을 통해 인구와 면적 모두 일본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고, 이 시기를 ‘대오사카(大大阪) 시대’라 부릅니다. 이 시기에는 미도스지(御堂筋)나 사카이스지(堺筋)를 따라 백화점과 영화관이 늘어서며, 문화의 중심지로서도 번영했습니다.
19세기 오사카의 한 항구에서 쌀과 물자를 운반하는 모습 Ⓒ大阪市立図書館デジタルアーカイブ
그러나 이러한 영광도 잠시, 다시금 오사카의 쇠퇴가 시작됩니다. 1937년(쇼와 12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시 체제하에서 군수 산업이 발전했고, 이 분야에서 앞서 나간 도쿄에 비해 오사카는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태평양 전쟁 말기의 오사카 대공습으로 많은 시가지와 공장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고, 전후 부흥기에 도쿄에 비해 뒤처지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전후 고도 경제성장기에 접어들면서는 정치·경제의 중추 기능이 도쿄에 집중되는 ‘도쿄 일극 집중’이 가속화되었습니다.
1964년에 도카이도 신칸센이 개통되어 도쿄로의 이동이 편리해진 것을 계기로, 1970년대 이후 오사카권과 나고야권은 인구가 순유출로 전환된 반면, 도쿄권은 일관되게 순유입 상태를 유지했고, 그 격차는 계속해서 확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도쿄에 살고 있으면 이런 상황을 자각하기 어렵지만 오사카 입장에서는 심각한 상황이며, 현재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사카의 발전을 지탱해 온 철도와 터미널역
오사카라는 도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바로 ‘기타(キタ)’와 ‘미나미(ミナミ)’입니다. 각각 오사카역·우메다역 주변을 가리키는 ‘기타’와, 난바·신사이바시역 주변을 가리키는 ‘미나미’를 말합니다. 이들은 오사카를 대표하는 번화가이며,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지역입니다. 명칭의 유래는 북쪽 지역(北)과 남쪽 지역(南)이지만, 오사카에서는 가타카나 표기로 ‘기타’, ‘미나미’라고 씁니다.
먼저 ‘기타’인 오사카역·우메다역 주변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사카에 가서 신기하게 느껴지는 점은 철도 회사가 같은 장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 이름이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JR에서는 오사카역, 한큐전철에서는 오사카우메다역, 오사카 메트로에서는 우메다역/니시우메다역/히가시우메다역이라 불립니다. 이들 역은 모두 지하상가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구역을 통틀어 ‘우메다’라고 부릅니다.
오사카역 주변 모습 ⒸJapan National Tourism Organization
우메다의 발전은 1874년, 일본에서 두 번째로 개통된 국철의 오사카~고베 구간에서 시작됩니다. 당시에는 시가지였던 운하 근처 도지마에 역을 만들 계획도 있었지만 반대 운동 등의 이유로 북쪽의 습지대에 역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반대 운동의 주요 이유는 연기와 불티를 내뿜는 증기기관차가 목조 건축물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화재를 유발할 수 있는 ‘민폐 시설’로 여겨졌다는 데 있습니다.
고베와 오사카를 잇는 철도가 최초로 건설된 것은, 신바시와 요코하마의 관계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메다’라는 지명의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논밭(습지대)을 메운 장소, 즉 ‘우메타(埋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발전 과정에서 해당 장소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같은 발음이면서도 길조(吉兆)의 의미를 지닌 ‘우메다(梅田)’로 표기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지명 변경은 도쿄에서도 있었는데, 스미다구(墨田区)가 예전에는 스미다(隅田)였으나 같은 발음이면서 길조의 의미를 지닌 ‘스미(墨)’로 바뀐 사례가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 명칭의 개명은 일본 각지에서 종종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889년 신바시~고베 간 도카이도선 전 구간이 개통되면서 물류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고, 오사카역 북쪽에는 거대한 화물 노선이 정비되어 갔습니다. 개통 당시에도 수운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오사카역에도 직접 배가 들어올 수 있도록 운하가 개척되며 물류 거점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1928년에는 여객과 화물의 분리가 이루어져 현재의 여객 오사카역은 고가화되었고, 화물은 그 북쪽에 위치한 우메다 화물역이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일본 유수의 도시였던 우메다는, 1910년 한큐전철의 한큐우메다역 개업으로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한큐전철의 창업자 고바야시 이치조의 비즈니스 모델
한큐전철의 창업자는 고바야시 이치조입니다. 그는 철도를 중심으로 한 도시개발, 유통사업, 관광사업 등을 일체적으로 추진하며 시너지를 창출하는 사철(민간 철도회사) 경영 모델의 원형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이후 전국의 주요 사철이나 민영화된 JR이 고바야시 이치조 모델을 채택하면서 일본 철도회사의 경영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메다의 발전은 한큐전철과 그 창업자인 고바야시 이치조의 존재와 떼어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단지 철도를 놓는 것이 아니라, 노선을 따라 스스로 가치를 창출한다”라는 획기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고안했습니다. “여유 있는 생활의 창조”를 목표로 편리하고 쾌적한 주택에 살며, 백화점에서 쇼핑이나 연극 관람을 즐길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가 만든 비즈니스 모델의 대표적인 예로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은 노선 주변 개발입니다. 교외에 주택지를 개발하고 도심과 연결되는 철도사업을 성공시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주목할 점은 주택을 분할로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고바야시 이치조의 첫 사회생활은 은행의 샐러리맨이었습니다. 취직 당시에는 셋집에 살며 자가 주택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자신과 같은 샐러리맨이 어떻게 하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계기가 되어 교외에 주택지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사카 우메다역 플랫폼 모습. 한큐전철의 모든 열차는 팥색으로 도색되어있다. ⒸWikimedia Commons, MaedaAkihiko
주택 사업의 성공 후 터미널 백화점에 집중합니다. 세계 최초의 터미널역 직결형 백화점인 한큐백화점을 건설하여, 철도를 타는 그 자체의 목적을 창출했습니다. 역에 병설된 시설은 평일에는 출퇴근이라는 목적에 따라 아침과 저녁에 이용객이 많지만, 주말이나 낮에는 이용객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주말에는 가족이 함께 백화점에서 쇼핑과 식사를 하고, 평일 낮에는 전업주부들이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이용 시간, 이용객, 이용 목적을 세분화해 운영했습니다.
한큐백화점 오사카 우메다 본점 모습 ⒸWikimedia Commons, KishujiRapid
다음으로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고속철도화입니다. 오사카의 철도망은 도쿄의 야마노테 순환선에서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철도망과 달리, 국철(JR)과 병행하는 노선도 많아 경쟁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내다본 고바야시 이치조는 도카이도 신칸센과 같은 선로 폭인 표준궤(1435mm)를 채택했습니다. 이 규격은 협궤(1067mm)를 채택했던 국철 차량과 비교해 고속화 및 대량 수송에 유리해 한동안 속도와 수송력에서 한큐전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자 국철도 ‘신쾌속’이라는 열차 운행으로 맞대응했고, 1987년 국철이 민영화되어 JR 서일본이 된 이후에는 더욱 공세를 강화하여 현재는 JR 서일본이 우세한 상황입니다. 한큐전철도 이에 질 세라 지금도 다이어 개정, 열차 종류 변경, 소요 시간 단축 등 다양한 대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고바야시 이치조는 “건전한 오락을 대중에게 폭넓게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연극·영화를 중심으로 한 엔터테인먼트 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연극에서는 1913년에 다카라즈카 가극단을 창설했습니다. 창설 초기부터 “노소남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국민극”을 기조로 했습니다. 어떤 세대가 보더라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연극(뮤지컬)과 연예(리뷰)를 꾸준히 공연했으며, 역사극, 판타지, SF 등 매우 다양한 내용의 극을 만들었습니다.
100년을 이어온 도시를 만드는 도시개발 혁신가들의 핵심 능력
이야기가 옆길로 새지만, 근대 일본 도시개발의 시조라 불리는 고바야시 이치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시개발의 혁신가들에게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고바야시 이치조는 사업가인 동시에 소설가이기도 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기도 했고,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대본이나 에세이도 집필했습니다. 모리빌딩의 모리 미노루 사장도 젊은 시절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소설은 이야기를 만드는 일로, 때로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망상을 글로 옮기는 능력이 요구되곤 합니다. 기존 상식을 모방하거나 마케팅 리서치만으로 이야기를 쓴다면 새로운 아이디어는 생겨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것을 몽상하고 형상화하는 행위는, 미래를 꿈꾸며 도시를 개발하는 일과 닮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업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던 한큐전철 창업자 고바야시 이치조 Ⓒ다카라즈카 가극 공식 홈페이지
과거 어떤 프로젝트에서 1984년에 만들어진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 도시 디자인을 담당한 미술감독 시드 미드와 모리 미노루 사장의 대담 자리에 함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시드 미드는 롯폰기 힐즈의 거리를 보고 극찬했습니다. 이 거리에는 단순한 건축물만이 아니라 훌륭한 세계관을 그려낸 감독이 있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모리 미노루 사장이 쑥스러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전원도시론의 영향을 받아 시부야 개발로 이어지는 회사를 창립한 시부사와 에이이치나, 세이부 유통 그룹을 이끌며 이케부쿠로나 시부야 개발을 진행한 쓰쓰미 세이지 등도 집필 활동을 했습니다. 100년을 이어오는 도시는, 그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메키타 프로젝트, 오사카의 역사와 미래를 교차하다
우메다의 도시 개발을 상징하는 ‘우메키타 프로젝트’는 오사카의 역사와 미래가 교차하는 장대한 사업입니다. 오사카역 북쪽에 있었던 광대한 화물 기지 부지에 새로운 형태의 도시가 조성됩니다. 단순한 빌딩 건설에 그치지 않고, 도시 전체의 가치를 창출하려는 고바야시 이치조의 이념이 계승되어 있습니다.
오사카역 북쪽에 있던 부지를 개발하는 '우메키타 프로젝트' ⒸUmekita 홈페이지
‘녹지의 창조’라는 콘셉트 아래 JR 오사카역과 직결된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공원인 ‘우메키타 공원’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도심 속 휴식처와 ‘이노베이션’의 창출을 목표로 한 공원 인접 복합 시설에서는 산·관·학이 연계하여 새로운 기술이나 비즈니스를 탄생시키기 위한 교류 거점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도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활력과 연계하는 방안도 포함한 것입니다.
대규모 프로젝트 전체가 지향하는 것은, 2025년 오사카·간사이 엑스포를 내다보고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메키타 지하 신역 개통으로 간사이 국제공항에 대한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우메다는 문자 그대로 ‘세계로 열린 관문’으로서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화물 열차가 오가던 광대한 땅에 지금은 녹지와 최첨단 기술이 융합된 새로운 도시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고바야시 이치조가 내세운 ‘창조한다’는 정신이 시대를 넘어 꾸준히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