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0년간 서울 남산 자락을 지켜온 힐튼서울은 흰색 천으로 가려진 채 철거 중입니다. 사람으로 생각하면 은퇴를 한 셈이죠. 그러나 서울이라는 도시에 힐튼서울이 남긴 업적은 꽤 화려합니다. 이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도록 바로 이웃에 위치한 피크닉에서는 힐튼서울의 생애를 담은 전시 <힐튼서울 자서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힐튼서울 자서전>은 한국 현대건축의 수작으로도 꼽히는 힐튼서울의 탄생부터 해체의 과정을 자세히 담아냈습니다. 힐튼서울이 위치한 ‘양동’ 지역 재개발부터 시작해 1970년대 서울에서 특급호텔이 지어지는 과정을 되짚습니다. 전시는 1층에서 힐튼서울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며 시작되고, 2층에서는 만들어진 과정을 소개합니다. 이어 힐튼서울의 역사와 이야기를 보여주는 3층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4층에는 힐튼서울의 상징과 같은 크리스마스 기차 모형 전시와 함께 미래의 모습, 이오타 서울의 영상이 재생됩니다.

<힐튼서울 자서전>전시에서 볼 수 있는 힐튼서울의 건물 모형 ⒸSPI 플랫폼 마케팅팀

힐튼서울은 이오타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공간으로 재개발될 예정이다. 현재는 철거를 위해 가려져있다. ⒸSPI 플랫폼 마케팅팀
만들고 가꾸는 과정에서 오간 <대화들>, 건축의 구체적인 <장면들>, 호텔을 지켜온 <사람들>을 담아내며 힐튼서울 다음의 미래까지 이어지는 구성입니다. 힐튼 인터내셔널과 김종성 건축가가 주고받은 팩스와 도면, 건축에 사용된 자재는 물론 활황기 호텔의 풍경과 그 시절 실제로 쓰였던 물품들을 상세히 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그로 인해 힐튼서울이 무생물의 건축물이 아닌, 개인의 이야기 속에 살아있는 유기체로 느껴집니다. 전시 타이틀이 <힐튼서울 자서전>인 이유가 이해될 정도로 한 건축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힐튼서울을 철거하면서 수거된 패널과 대리석, 건축 당시 사용된 호텔 로비 도면 ⒸSPI 플랫폼 마케팅팀
이렇게 기록과 기억의 필요성이 클 정도로 힐튼서울은 한국 건축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철거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시는 논란을 되짚기보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만들어 가는 이들에게 힐튼서울의 사례를 통해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끊임없이 재개발∙재건축이 이어지는 서울 도심에서 건축 자산의 기억과 흔적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개발 과정에서의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여는 전시입니다.
오래된 건축물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
힐튼서울처럼 도시의 아이콘 또는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했던 건축물들은 시간이 쌓이며 자연스레 미적 완성도나 구조, 구하기 힘든 자재를 넘어 이야기가 쌓입니다. 건물 그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의 경험과 시간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기 때문입니다. 호텔이 문을 연 1983년부터 힐튼서울은 연말 모임이나 결혼식, 크리스마스트리와 자선 기차로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주던 곳이었습니다. 직장인들에게는 비즈니스 미팅 장소이자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서울의 첫인상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죠. 실제 국가적 행사도 많이 열렸습니다. 서울을 대표하는 공간이었던 것이죠.
이처럼 건축의 물리적 완성도, 특정 세대가 공유한 사회문화적 기억, 그리고 서울이라는 도시가 세계와 만나게 된 상징적 무대였다는 점 등이 더해져 힐튼서울의 가치가 만들어졌습니다. 단순한 호텔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공간’으로 인식되었기에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상실감의 이유에 대해 <은퇴 없는 건축>에서 황두진 건축가는 “오래된 건물이 없어지는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복합적인 충격으로 다가온다.”라며, “오래된 건물이 항상 내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내가 그것을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 만족감은 굉장히 크다.”라고 설명합니다.

현대건축물의 소멸과 관련된 추천 도서 중 하나로 전시에 활용된 도서 <은퇴 없는 건축> ⒸSPI 플랫폼 마케팅팀
오래된 건물은 도시의 이야기는 물론 개인의 정신적 만족감까지 책임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같이 다층적 기능을 담당하기에 경제적 논리만으로 건축물의 쓸모와 존속 이유를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죠.
도시의 성장에 필연적인 재개발∙재건축
오래된 건축물이 도시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만큼이나 도시의 성장과 발전 과정에서 개발의 필요성도 존재합니다. 일례로 힐튼서울 역시 1976년에 제정된 도시재개발법에 따라 진행된 구도심의 대규모 철거와 재개발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양동 도심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판자촌이 철거된 자리에 들어선 것이죠. 현대 서울로의 변화와 당시 사람들의 니즈를 반영한, 도시 개발의 성공 사례이기도 한 것입니다.

힐튼서울이 있던 양동 지구 재개발 당시 자료들 ⒸSPI 플랫폼 마케팅팀
힐튼서울은 의미 있는 공간인 동시에 상업 시설입니다. 상업공간의 본 기능은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고, 힐튼서울이 그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지 못했기에 더 나은 수익 가치 창출을 위한 변화에 직면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 이제 성숙기에 접어든 도시 서울은 인구와 교통, 업무 수요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수용할 새로운 인프라와 자산이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재개발∙재건축을 통한 변화 발전이 지속적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서적 가치나 문화적인 가치가 크다 하더라도, 도시가 발전하면서 자산과 상업공간은 해체와 재개발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도시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하면서 달라지고, 그 시대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변화는 결국 자산의 외형인 건축물이라는 형태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일은 도시가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힐튼서울의 재개발 역시 그런 맥락 속에서 현대 서울의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가는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도시 경쟁력 강화에는 보존과 개발의 협의가 중요해
개발과 보존은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건물을 단순히 짓거나 허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협의와 합의를 통해 이야기를 남겨야 합니다. 이런 지점에 있어서 황두진 건축가는 저서 <은퇴 없는 건축>에서 건축물의 생사를 결정하는 데에는 사회적인 합의와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레거시 플레이스라는 개념과 기준을 만들고 알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지속 가능성은 건축적 보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치를 인정받아 유지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 가치는 단순한 미적 가치나 역사성만이 아니라, 현대 도시가 요구하는 공간적 수요와도 연결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레거시 플레이스는 단순한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자산으로서 재정의될 가능성을 품는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보존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축물의 창출 가치까지 고려한 맥락입니다.
건축물은 혼자 지어질 수 없습니다. 소유권자와 그 건물을 지은 건축가, 공간을 누볐던 사람들까지 관계된 이들이 다양하기에 건축물의 생애와 관련된 협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해관계자들, 투자자와 디벨로퍼, 도시 행정가, 건축가, 지역 주민까지도 함께 논의하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개발의 수익성과 도시의 정체성, 시민의 정서적 가치를 어떻게 조율하고 보존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이죠.
보존과 개발이 맞물리는 순간에도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새로 쌓아 올릴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협의, 이를 통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도시는 한 시대의 기억이 지워지고 또 다른 모습이 들어서는 단절의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가 켜켜이 이어지는 무대가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흔적 위에 현재의 필요가 더해지고, 그 위에 미래의 비전이 겹쳐질 때 비로소 도시는 연속성을 가진 풍경으로 살아납니다. 힐튼서울은 비록 해체되었지만, 이오타 프로젝트와 함께 앞으로 균형 잡힌 도시 개발의 방향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