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고대했던 길고 긴 연휴의 끝판왕인가. 평생 불로소득을 꿈꾸는 주 5일제 회사원이 단 하루의 연차만으로 열흘을 내리 쉴 수 있었던 2017년 10월 이후 가장 길고 풍성한, 마치 ‘영원히 깨질 수 없는 gonna be gonna be golden’과도 같은 황금 연휴의 축복을 무사히 맞이했다. 장장 열흘에 가까운 과식 대장정을 앞두고 먹장금 월례 먹기행 에디터로부터 ‘긴 명절 연휴가 끝난 후 느끼함을 잡아줄 수 있는 곳을 골라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톡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산더미 같은 부침개와 산적, 송편, 잡채 등으로 구성된 한가위 식단의 느끼함은 보통 피자, 햄버거의 느끼함으로 맞서 동서양의 밸런스를 맞추는 편인데 이런 정공법은 아무래도 공복이 미덕이자 간헐적 단식이 유행인 이 흉흉한 시대적 흐름에 어울리지 않겠지.
매해 추석마다 억울한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송편이란 놈의 배신적인 칼로리이다.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 순식간에 뚝딱인 깨송편 열 개가 무려 버거킹 와퍼와 열량이 비슷하다니. 이름만 들어도 맨발로 숲속을 거닐 것 같아지는 솔잎을 깔고 찐 떡이라서 송편이라면서요. 추석 차례상에 올리고 온 가족이 나눠 먹으며 풍요와 평안을 비는 뜻도 좋고 모양도 고운 작은 떡이 왜 그렇게 사악한 칼로리냐고요. 어쨌거나 연휴 동안 송편과 고열량 친구들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후회와 죄책감을 라이트함의 대명사 베트남식 쌀국수로 희석시켜 보기로 한다. 뭔가 밀가루 국수보다는 금세 배가 꺼지고 소화도 잘될 거 같고 칠리소스를 적당히 넣으면 개운하기도 하고 수북이 쌓인 반쯤 익힌 숙주나물이 지친 혈관도 샤악 씻어내려줄 거 같고 오오 그래! 아침저녁으로 바람도 은근 차가워진 이쯤에서 꼭 뜨끈한 쌀국수(Pho)를 먹어줘야 하는 필연에 도달한다.
비욘드 비엣남(Beyond Vietnam)은 여의도 KBS홀 근처에 테이블 몇 개 없는 작은 식당에서 시작해 바로 건너편 지금의 자리로 넓혀 이전한 베트남 음식점이다. 일단 기본으로 국수를 골라야지. 양지, 구운 차돌, 우목심이 들어간 이 집의 시그니처 쌀국수인 비욘드 쌀국수가 메뉴 최상단에 있지만 그건 다소 서운하니까 차돌박이 쌀국수를 선택한다. 그리고 급등주 추천 리포트보다 더 신중하게 메뉴를 정독한 다음 현란한 손놀림으로 주문을 마치고 나니 알아서 시키라며 주문 태블릿을 필자에게 일임했던 일행의 따가운 눈빛이 와서 박힌다. (가볍게 쌀국수나 한 그릇 먹자며?) 흠흠, 자고로 한국 사람은 반찬이 있어 줘야 하는 법. 한식 상차림 중 가장 간소한 3첩 반상을 꾸릴 적에도 밥, 국, 김치, 장류는 첩 수에 포함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 배운 여자는 사뭇 당당하다.

비욘드 비엣남 매장 모습 Ⓒ먹장금

개운한 국물의 쌀국수와 수제 짜조 Ⓒ먹장금
간이 잘 맞는 소고기 공심채 볶음, 월남쌈을 바삭 튀겨낸 수제 짜조, 교촌의 풍미가 진하게 느껴져서 아는 맛이라 더 맛있는 베트남식 닭날개, 새우와 돼지고기가 들어간 비욘드 볶음밥을 엄선해 육해공 밸런스까지 고려한 꽤 그럴듯한 한 상이 차려졌다. 깔끔하고 개운한 국물의 쌀국수는 여의도 인근 쌀국수집 중 단연 최애의 맛이고 특히 이곳의 시그니처 볶음밥이 요물이다. 밥 자체도 알알이 잘 볶아져서 훌륭한데 글쎄 곁들여 나오는 파김치가 진짜 회심의 킥이다. 파김치라니 이건 반칙이지. 물론 베트남 현지의 맛 구현을 중시하는 오리지널 정통파들은 근본 없는 퓨전이 마땅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파김치란 한 가닥 먹고 나면 앞서 배불리 먹은 기억이 다 리셋되고 마치 첫 삽처럼 밥을 더 뜰 수 있게 되는 마법의 찬으로 탄산음료만큼이나 그 효능이 뛰어나다. 대체 어떤 먹짱이 이런 맛도리 조합을 생각해 냈을까.

시그니처 볶음밥과 곁들여 나오는 파김치 Ⓒ먹장금

교촌치킨이 떠오르는 맛의 베트남식 닭날개 Ⓒ먹장금
뭐든 덜어낼 줄 아는 자가 진정 고수라 했건만 미스 사이공 같은 자태로 호로록 가볍고 산뜻한 한 끼를 먹으려던 기특한 의도는 결국 파김치와 베트남 간장치킨에 날려 허공에 스러졌다. 하지만 아빠가 국수 가게를 하고 있는 쿵푸팬더 ‘포(pho)’의 체형을 생각해 보라. ‘포’는 심지어 이름조차 쌀국수 아닌가. 가는 세월을 막고 에이징 커브마저 이겨낸 필자의 오늘 식탐은 비단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