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
인프라 투자
도로
항만
발전
에너지
운영의 효율성
공공성의 지속
월요일 아침 플랫폼에서의 단상
아침 일찍 일산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하는 날이었다.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을 수 있기에 승용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차 없이 과천에서 일산까지 간다는 건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스마트폰 지도 앱을 열어 1시간 만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과천역에서 4호선을 타고 서울역에 가면 대곡역까지 가는 GTX-A를 탈 수 있다. 3호선으로 환승해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백석역이다. 두 번 갈아타야 하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GTX-A를 타려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일산·파주에서 온 출근 인파가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시속 180km로 달린 준고속열차는 10분 만에 대곡역에 도착했다. 대곡역에서 3호선을 기다리다 보니 옛날 생각들이 머리를 스친다. 지난 2004년 KTX가 개통될 당시 서울에서 부산까지 편도 4만 5,000원이나 하는데 누가 이용하겠냐는 우려가 많았다. 지금은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KTX 좌석을 구하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강릉행 KTX를 건설할 때도 동계올림픽을 위한 졸속 투자가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다. 지금은 경포대에 커피 마시러 강릉행 KTX 표를 산다.

10여 년 전 해외자원개발펀드 투자를 위해 인도네시아에 출장을 갔다. 자카르타는 교통체증이 심해서 하루에 두 가지 일을 볼 수 없다는 말을 피부로 체감했다. 자카르타에서 100km 떨어진 석탄광산을 실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을 서둘렀다. 현지 경찰에게 뒷돈을 주고 에스코트를 받아야 했다. 왕복 2차선 도로의 교통체증을 뚫고 가려면 경찰이 길을 터줘야만 했다. 반대편 차선을 막고 우리를 보내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해서 겨우 밤늦게 자카르타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베트남에 가족여행을 갔던 기억도 났다. 나짱에 사는 지인의 초대로 승합차를 타고 호치민을 출발했다. 2차선 도로에는 자동차도 다니고 오토바이도 다니고 자전거도 다니고, 심지어 갓길에 사람은 물론이고 소와 닭도 다녔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도 중간중간 통행료를 냈던 기억이 난다. 아침 일찍 호치민을 출발했는데 밤이 어두워져서야 나짱에 도착했다. 그래도 베트남은 인도네시아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베트남 하노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병원에 일찍 도착했다. 검사 결과가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여의도로 돌아와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프라는 과학과목이 아니라 역사과목이다
업무상 인프라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종종 있다. “인프라는 안정적인 것 아니에요?”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펀드매니저는 “인프라는 수익성은 괜찮은 것 같은데 듀레이션이 너무 길고 거래도 잘 안 되어서 투자 안 할래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10여 년 전부터 해외 인프라펀드에 투자해 재미를 본 기관투자자들이 늘었다. 그러자 너도나도 인프라펀드 상표를 붙여 세일즈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마치 인프라가 안정성을 보증하는 보증수표인 양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해외 프라이빗에쿼티(Private Equity) 펀드가 잘 안 팔릴 때는 “이건 인프라”라며 딱지를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인프라 자산을 하나의 틀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라마다 정책과 제도가 다르고 사회적 수요와 공급, 리스크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종종 인프라는 과학이 아니라 역사 과목이라는 말을 한다. 엑셀로 30년 장기 추정을 해서 수익률이 잘 나온다고 성공하는 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프라는 어느 시점에서 한 나라의 국민들이 공공재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해왔는가에 대한 정치적 대응과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미시적으로는 소비자의 선택에 대한 함수이고 거시적으로는 그 사회의 역사적 배경과 발전 방향에 대한 예측이 필요하다. 
 
 
제로금리 시대가 만든 부동산의 착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경기 부양을 위해 대규모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전 세계는 10년 넘게 ‘돈이 넘치는 시대’를 경험했다. 기업과 개인 모두 자금 조달 비용이 낮아지면서 부동산은 가장 손쉬운 투자처로 인식되었다.
도시 곳곳에 오피스와 상업시설이 늘어났고, “빌딩은 영원한 자산”이라는 믿음이 시장을 지배했다. 그러나 2021년 이후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급격한 금리 인상은 이 신화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재택근무 확산으로 오피스 수요가 줄고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평가 손실이 커졌다. 여기에 선순위 대출금리 상승이 겹치며 리파이낸싱에 실패해 경매로 넘어가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자 비용은 높아지고 공실률이 올라갔다.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던 상업용 부동산이 가장 먼저 흔들렸다.
 
 
인프라의 회복력, 시간에 투자한 자산
하지만 같은 시기 인프라 자산은 견조한 흐름을 유지했다. 도로·철도·발전·통신·폐기물 등 장기계약 기반의 현금흐름을 지닌 자산들은 유동성 축소와 금리 상승에도 부실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인프라는 수요가 경기와 무관하게 유지되는 비탄력적 자산이며 수익이 계약 구조와 제도적 틀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금리가 오르든 내리든 교통·에너지·통신·환경 서비스는 멈출 수 없고 그 지속성이 바로 현금흐름의 근원이다. 따라서 인프라는 시장 사이클에 덜 흔들리는 구조적 자산이며 위기의 시기에 그 진가가 드러난다. 결국 인프라 투자는 ‘시간’에 투자하는 일이며 그 시간이 곧 자산의 본질적 가치가 된다.
인프라 자산은 인플레이션 헤지 기능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민자고속도로는 소비자물가상승률을 반영해 매년 통행료를 올릴 수 있고 발전소는 가스 가격에 연동해 요금을 책정할 수 있다. 안정적인 자금 조달 구조도 주효했다. 5년 이내 매각을 전제로 하는 부동산 금융과 달리 라이프사이클에 맞춰 장기로 자금 조달을 한 프로젝트는 리파이낸싱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부동산과 인프라, 닮은 듯 다른 두 자산
SPI 독자에게 익숙한 부동산 투자와 인프라 투자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구조는 꽤 다르다. 부동산은 위치와 수요의 함수이지만 인프라는 제도와 계약의 함수다. 부동산이 소유와 가치 상승을 목표로 한다면 인프라는 운영의 효율성과 공공성의 지속을 전제로 한다. 부동산은 시장에 의해 평가받지만 인프라는 제도에 의해 평가받는다. 이 차이는 투자자의 행동을 결정짓는다. 부동산 투자자는 임차료와 자산가치를 중심으로 수익을 추적하지만 인프라 투자자는 서비스 제공의 안정성과 계약 이행을 평가한다. 부동산은 공간을 소유하는 자산이고 인프라는 사회의 기능을 운영하는 자산이다. 따라서 인프라 투자는 단순히 자본을 투입하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을 자산화하고 사회를 유지시키는 시스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
앞으로 인프라 투자의 기원부터 시작해 도로·항만·발전·에너지·폐기물·디지털 인프라까지 지난 30여 년간 한국 인프라 투자의 주요 변곡점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각 시기마다 정책과 금융,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어떻게 맞물렸는지를 살펴보며 앞으로의 인프라 투자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인프라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흥미롭게 다뤄볼 계획이다.

사람들은 GTX를 탈 때 자신이 절감하는 20분의 시간 가치와 추가로 지불하는 요금 3,000원을 비교한다. 2004년 부산행 KTX 요금 4만 5,000원은 꽤 큰돈이었지만, 2025년의 5만 9,800원은 쉽게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다. 인프라 투자에서 인플레이션은 항상 고려해야 할 요소다. 대출받아 갚아야 하는 금액은 명목 가치이지만 이용자가 지불하는 금액은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실질가치다. 서울춘천고속도로가 주말마다 꽉 막히고 주중에도 강릉에 커피를 마시러 가기 위해 KTX를 타는 것은 유발 수요로 설명할 수 있다. 현재의 수요만으로 분석하면 인프라의 비용편익비율(B/C ratio)은 1 미만으로 산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과소공급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프라는 유발 수요와 지역 개발 투자를 창출한다. 인천공항이 아시아 허브 공항으로 성공한 이유는 해외여행객이 늘어서만은 아니다. 일본과 중국 등에서 환승 수요를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KTX 개통 후 20년이 지난 광명역 역세권은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이는 인프라가 지역경제와 부동산가치에 미치는 유발효과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시리즈가 우리나라 인프라 투자의 궤적을 되짚어 보는 동시에 다가올 시대의 지속 가능한 투자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마중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다. 다음 글에서는 <민간이 언제부터 인프라에 투자했을까>라는 주제로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김형윤

김형윤

KB자산운용 경영자문역

장기신용은행에서 SOC 민자사업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국내 대체투자 시장의 성장 과정을 이끌어왔다. 현대증권에서 자산유동화 초기 시장을 개척하고 국민은행 투자금융부에서 M&A 인수금융과 인프라 투자 사업을 주도했다. 2005년 KB자산운용에서 발해인프라펀드를 설립하여 국내 인프라펀드 시장의 기반을 구축했으며 이후 부동산·인프라·PE·PDF 등 대체투자 전반을 총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