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틈틈이 떠났던 지난 몇 년 간의 여행과 현장 답사는, 저에게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도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번에 공유할 “유럽의 미술관”이라는 주제는 단순히 예술을 ‘보고 경험하는 공간’을 넘어 “도시 · 자연 · 건축 · 조경 · 커뮤니티 · 사회 기여 · 여가 · 미술 컬렉션”의 힘이 모두 만나는 접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 첫 번째 시리즈로 ‘교외형 미술관’을 살펴봅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크뢸러 뮐러 미술관, 보르린덴 미술관, 싱어 라렌 미술관, 바이엘러 파운데이션 미술관, 파울 클레 미술관 등은 모두 대도시 중심부의 상징적 아이콘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들 미술관은 도시의 위상과 GDP를 단기간에 끌어올리는 이벤트성 랜드마크 프로젝트라기보다는, 도시–교외–자연을 잇는 장기적 문화 인프라로 기능해 왔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2020년부터 2025년까지 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 등 유럽의 교외 미술관들을 직접 걸으며 느낀 경험들을 바탕으로, 연재 시리즈를 새롭게 선보이고자 합니다. 이 시리즈는 여행기이자 도시 인사이트이며, 예술과 자연이 어떻게 한 지역의 문화 및 경제 생태계를 바꾸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교외의 미술관에서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다.
바다와 언덕이 내려다보이는 미술관 Ⓒ장남수
이 미술관을 처음 찾는 방문자 대부분은 “왜 이렇게 도시 외곽에 있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 질문이 자연스럽게 바뀝니다.
“그래, 이 미술관은 굳이 도심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아니, 주변에, 그곳에 있어서 좋았어.”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작품을 전시하는 장소이기 이전에, 도시와 자연, 일상과 예술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하나의 공간 모델입니다. 이 글은 그 공간을 단순히 ‘아름다운 미술관 중의 하나’로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이 미술관이 오늘날 도시와 주거, 공공공간을 논의할 때 중요한 참조점이 되는지를 같이 공감해 보고자 합니다.
접근 동선에서 바라본 숲과 바다, 미술관 전경 Ⓒ장남수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북쪽으로 약 40분, 외레순 해협을 따라 이어지는 해안 도로를 벗어나면, 또는 기차역에서 내리면서부터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은 도시의 소음과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방문자를 맞이합니다.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관람은 이미 시작되어 있습니다. 미술관의 진짜 입구가 ‘건물’이 아니라, 완만하게 이어진 정원과 숲길, 그리고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풍경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루이지애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핵심은, 이곳이 단순히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미술관은 도시와 자연, 예술과 일상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연속된 경험으로 설계된, 매우 정교한 문화 인프라입니다.
1958년 개관 이후 지금까지 루이지애나는 덴마크를 넘어 북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으로 자리 잡았으며, 국제 미술관 평가에서도 꾸준히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회성 아이콘이나 건축적 기념비성에 의존한 결과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일관된 공간·컬렉션·운영 전략의 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면, 전시는 하나의 고정된 동선이 아니라 풍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분절됩니다. 긴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열리며 바다 또는 호수가 등장하고, 다시 숲으로 시선이 돌아옵니다. 작품은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자코메티의 조각들이 창 너머의 호수를 배경으로 서 있는 장면은, 이 미술관의 공간 철학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순간 중 하나입니다. 조각은 더 이상 독립된 오브제가 아니라, 풍경과 함께 인식되는 하나의 장면이 됩니다.
(좌) 전시장의 복도와 자연과의 연계 (중앙) 반지하로 묻힌 전시관과 정원 (우) 자코메티 조각과 창, 호수 풍경 Ⓒ장남수
루이지애나의 건축은 확장과 증축을 반복해 왔지만, 어느 시점에서도 과시적이거나 단절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기존 건물과 정원, 숲과 해안선의 흐름을 존중하며 ‘덧붙이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지하, 반지하 공간을 적절하게 같이 활용하여 방문자들은 자연스러운 회유 동선 속에서 자연과 미술을 번갈아 가면서 감상하게 됩니다.
이 점은 오늘날 대형 미술관들이 흔히 빠지는 스케일 경쟁, 아이코닉한 외관 경쟁과 뚜렷이 대비됩니다. 루이지애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풍경을 훼손하지 않는 건축’, ‘머무르기 위한 공간’을 전제로 계획되어 왔습니다.
(좌) 루이지애나 미술관 평면도 Ⓒ 루이지애나 미술관 홈페이지. (우) 지평선과 닮은 전시관과 정원과의 관계 Ⓒ 장남수
이러한 공간 전략은 컬렉션과도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루이지애나는 자코메티, 헨리 무어, 알렉산더 칼더 등 20세기 조각사의 핵심 작가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으며, 이들의 작품은 실내와 야외, 정원과 복도를 넘나들며 배치됩니다. 특히 칼더의 모빌이 자연광 아래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장면은, 전시가 ‘보는 행위’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경험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칼더 모빌과 바다, 자연광을 함께한 전시 장면 Ⓒ 장남수
헨리 무어 작품과 자연광을 함께한 전시 장면 Ⓒ 장남수
이 미술관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일상의 밀도’입니다. 루이지애나의 카페와 레스토랑, 휴식 공간은 부대시설이 아니라 전시 경험의 일부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식사를 하며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 정원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풍경, 관람객이 작품 앞이 아니라 창가에 앉아 머무는 장면들은 이 공간이 지역사회와 관광객 모두에게 ‘특별한 목적지’이자 ‘반복 방문 가능한 장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레스토랑 테라스 및 외부 정원, 바다, 나무와 자연광이 어우러진 공간 Ⓒ 장남수
카페에서 바라본 정원과 외부 풍경 Ⓒ 장남수
도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루이지애나는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런던의 Tate Modern, 뉴욕의 MOMA, 파리의 Pompidou center)처럼 단기간에 도시 GDP를 끌어올린 대규모의 상징적 프로젝트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미술관이 만들어낸 효과는 훨씬 장기적이며 구조적입니다. 코펜하겐 북부 교외 지역은 루이지애나를 중심으로 문화·관광 벨트가 형성되었고, 이는 숙박, 레스토랑, 소규모 상업시설, 주거 환경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졌습니다. 미술관 방문을 목적으로 시작된 체류는 하루를 넘기고, 지역 전체를 경험하는 일정으로 확장됩니다.
이 지점에서 루이지애나는 한국의 지역 문화시설, 도시 재생 프로젝트와 분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국내 다수의 문화시설이 여전히 ‘이벤트성 방문객 수’와 ‘단기 성과 지표’에 매여 있는 반면, 루이지애나는 방문객의 체류 경험, 재방문, 그리고 지역의 일상적 리듬 변화에 집중해 왔습니다. 이는 문화 인프라를 단순한 시설이 아니라, 도시의 생활 구조를 조정하는 장치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한 접근입니다.
설립자 크누드 W. 옌센(Knud W. Jensen)의 역할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루이지애나를 개인의 사적 컬렉션 과시가 아닌, 공공을 위한 문화 자산으로 명확히 규정했습니다. ‘올드 머니’ 컬렉터로서의 자본은 이곳에서 사회적 환원과 장기적 공공 가치 창출로 전환되었고, 이는 덴마크 문화 정책과도 자연스럽게 접합되었습니다. 이 미술관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축적되는 공공 인프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의 기여는 단순한 기증을 넘어, 북유럽 문화 정책이 지향하는 열린 문화 인프라 모델의 원형을 제시했다는 데 있으며, “소유의 공간”이 아니라, 자연·건축·예술이 균형을 이루는 공공적 “경험의 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좌) 커뮤니티를 강조한 관람형 전시의 결합 (우) 어린이 또는 가족 관람객이 머무는 공간/야외 작품과 사람의 거리 Ⓒ 장남수
결과적으로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은 ‘교외형 미술관’이라는 유형을 넘어, 도시와 자연, 문화와 경제를 연결하는 하나의 정교한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곳은 도시의 외곽에 위치하지만, 도시의 중심을 대신하는 문화적 중추로 기능합니다. 수치로 환산되는 성과는 도심형 메가 프로젝트보다 작아 보일 수 있으나, 삶의 질, 도시 브랜드, 장기적 관광 가치라는 측면에서 그 영향력은 오히려 더 깊고 지속적입니다.
특히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오늘날 세계 주요 미술관 순위에서도 최상위권으로 평가되며, 코펜하겐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 문화 벨트의 핵심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방문객 수 증가를 넘어, 코펜하겐 북부 연안 전체를 “살기 좋은 문화적 교외”로 인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루이지애나 인근 훔레벡(Humlebæk)은 미술관 개관 이후 주거 선호도가 상승했고, 고급 주거지와 문화 관광이 공존하는 지역 이미지가 안정적으로 구축되었습니다.
오늘날 도시 재생과 문화 기반 개발을 고민하는 부동산·도시 전문가들에게 루이지애나는 분명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공간은 도시의 일상을 얼마나 섬세하게 바꾸고 있는가? 루이지애나는 그 질문에 대해,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용하지만 단단한 답을 축적해 온 사례입니다.
(좌) 내부 벽면에 조각 작품처럼 설치된 미술관 도면 (우) 외부 전시와 자연과의 연출 Ⓒ 장남수
Epilogue. “교외의 미술관에서 배우는,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
1.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미래 도시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의 매우 설득력 있는 방향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많은 것을 담는 도시가 아니라, 덜 밀집되지만 더 깊게 체류할 수 있는 공간의 가능성입니다.
2. 오늘날 주거, 시니어 하우징, 공공시설, 복합개발을 논의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는 ‘커뮤니티’와 ‘웰니스’이지만, 이 단어들은 종종 프로그램과 마케팅 문구로만 소비됩니다. 루이지애나는 언어가 아니라 공간과 환경, 그 자체로 이 개념들을 증명합니다.
3. 이 미술관이 교외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며, 그것은 도시 이후의 삶, 그리고 도시 바깥에서도 성립하는 높은 수준의 공공성을 실험하는 하나의 선언에 가깝습니다.
4. 루이지애나에서의 경험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도시의 모든 것이 반드시 중심에만 있을 필요가 없으며, 도시의 외곽에서도 좋은 공간은 사람을 자주 오래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그 ‘머무름의 질’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설계해야 할 도시의 핵심 기준이 될 것입니다.”
실내 전시 공간과 카페, 주변 언덕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극대화 되는 경험 Ⓒ장남수
장남수
HDC I&Cons Advisor
20여년간 HDC아이앤콘스 CEO, MDM, KT&G, CJ와 정림건축을 통해 도시와 콘텐츠에 대한 일을 해왔습니다. 시행과 시공, 설계와 운영, 분양과 임대, 대행과 자문, 건물주와 테넌트, 창업과 협업까지. 양수겸장의 View를 지닌, Culture & Business Provider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