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퍼니싱 산업은 흔히 라이프스타일이나 취향 소비 영역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부동산 시장과 가장 밀접하게 맞물려 움직이는 산업 중 하나입니다. 최근 홈퍼니싱 시장은 소비 양극화 현상과 함께 복합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중저가 가구 시장이 경기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위축되는 반면, 럭셔리 홈퍼니싱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 견조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주거 공간을 대하는 소비자 인식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주거 경험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소비 여력이 있는 이들에게 ‘라이프스타일’은 쉽게 타협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들에게 홈퍼니싱은 선택 가능한 사치이면서 동시에 주거 환경과 삶의 완성도를 높이는 필수 요소에 가깝습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 공간이 제공하는 경험의 질이 곧 삶의 질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홈퍼니싱 시장은 부동산 경기의 단순한 ‘후행 지표’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거 공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축적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신호로도 볼 수 있습니다.
가구를 넘어 럭셔리 공간을 파는 RH
RH는 마치 산을 오르듯, 단계적으로 럭셔리를 향해 브랜드의 위상을 쌓아 올려온 미국의 홈퍼니싱 기업이자 브랜드입니다. 그러나 RH를 고급 가구나 인테리어 브랜드라는 수식어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들의 전략은 개별 제품의 품질이나 디자인을 넘어, 그 가구가 놓이는 공간과 그 안에서의 라이프스타일을 어떻게 제안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RH는 1979년 ‘Restoration Hardware’라는 이름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철물점이자 빈티지 가구를 판매하는 소규모 매장으로 출발했습니다. 이후 사업을 확장하며 성장했지만, 한때는 파산 위기에까지 몰리며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RH를 만든 전환점은 2001년, 윌리엄스 소노마 출신 게리 프리드먼(Gary Friedman)이 CEO로 합류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게리 프리드먼은 RH를 흔히 볼 수 있는 가구 브랜드의 틀 안에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럭셔리 컨셉을 바탕으로 주거 공간 자체를 제안하는 브랜드로 재구축하고자 했습니다. 브랜드의 포지셔닝을 근본적으로 재설정한 셈이죠. 이 전략의 핵심은 가구를 개별 상품으로 다루지 않는 데 있습니다. 대신 RH는 소파, 테이블, 조명과 같은 제품들로 완성된 공간을 보여줍니다. 마치 “당신의 집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RH가 매장을 ‘스토어(store)’가 아닌 ‘갤러리(gallery)’라고 부르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RH의 갤러리는 제품을 빠르게 비교하고 구매하기보다, 이상적으로 구성된 주거 환경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고객이 갤러리에서 경험한 공간과 라이프스타일을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구매해갈 수 있게끔 합니다.
고풍스러운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RH 파리 샹젤리제 갤러리. 중정과 연결된 인테리어 디자인 컨설팅 공간. Ⓒ이은송
또 하나 주목할 차별점은 RH가 홈퍼니싱을 유행이나 트렌드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RH는 시장의 빠른 변화를 따르기보다, 좌우 대칭과 비례, 절제된 색감, 클래식한 소재 등 비교적 일관된 미감과 구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트렌디한 새로움보다는 절제된 구성과 지속성을 중시하는, 이른바 올드머니적 미감에 가까운 접근인 셈입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RH는 럭셔리를 지향하는 영리치에게도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취향과 공간의 질서를 보다 쉽게 구현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합니다.
마치 파리에 사는 자산가의 저택에 들어온 듯한 인상을 주는 내부. RH 시그니처인 클라우드 소파와 화려한 샹들리에 장식. Ⓒ이은송
입지와 공간 구성으로 구축하는 브랜드 전략
최근 미국에서는 중산층 소비가 점차 위축되며, 중산층 고객을 타깃으로 한 럭셔리 홈퍼니싱 시장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RH는 기존 미국 내에서의 입지를 무리해서 확장하기보다, 브랜드의 정체성과 더 잘 맞는 해외 럭셔리 생태계로 진입하는 전략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파리입니다. 파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미감과 기준이 도시 전반에 축적된 곳입니다. 패션, 예술, 건축, 리테일 전반에 걸쳐 ‘럭셔리의 기준점’으로 기능해 왔고, 그 자체로 브랜드 신뢰를 검증받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또한 파리는 현지 중산층의 일상 소비와 더불어, 글로벌 고소득층과 미적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여행객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도시라는 점에서, RH가 겨냥해 온 고객층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기존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건물들과도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는 RH 파리 샹젤리제 갤러리. Ⓒ이은송
이러한 브랜드 전략은 RH의 매장 입지 선택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RH는 억만장자를 위한 브랜드는 아니지만, 꾸준히 상위 소득과 자산을 보유한 고객층의 프리미엄 주거 및 리노베이션 수요를 타깃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RH는 단기적인 소비가 집중되는 상권보다는, 고급 주거와 럭셔리 소비의 기준이 오랜 시간 형성되어 온 도시의 핵심 지역을 선택해 왔습니다. 파리 샹젤리제 갤러리는 RH의 입지 전략과 브랜드 정체성이 가장 응축된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샹젤리제는 파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거리입니다. 하이엔드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와 역사적 건축물이 밀집한 이곳은 파리 특유의 럭셔리한 무드와 전통성이 어우러지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RH는 이 지역의 특성을 통해 ‘트렌디한 인테리어 브랜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유지될 주거 미감의 기준을 제시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자 합니다. 샹젤리제라는 상징적인 입지는 RH가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 역시 이 거리처럼 시간이 지나도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매장인 갤러리의 공간 구성 역시 이러한 전략과 연결됩니다. 가구를 상품처럼 빽빽하게 진열하지 않습니다. 대신 방 단위로 구성된 공간을 통해 하나의 저택을 거니는 듯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가구는 공간의 구성 요소로 배치되어 있으며, 방문객은 자유롭게 갤러리 내부를 누비며 RH가 제시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누리게 됩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 탓에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매장에 놓인 가구들은 모두 직접 경험해볼 수 있다. Ⓒ이은송
RH는 파리 샹젤리제에서 갤러리가 도시의 미감과 질서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주거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건축 설계 파트너로 포스터 앤 파트너스를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건물의 구조와 동선은 물론, 파리 특유의 전망과 채광, 거리와의 관계까지 고려하며 이 공간이 도시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도록 설계했습니다. 그 결과 RH 파리 샹젤리제 갤러리는 하이엔드 가구를 판매하는 리테일 공간을 넘어, 파리라는 도시의 미적 기준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경험을 확장하는 레스토랑 & 바
RH 파리 갤러리의 상층부에는 레스토랑과 바, 그리고 루프탑 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존 리테일 공간에서 레스토랑은 흔히 체류 시간을 늘리거나, 그 자체로 유입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러나 이곳의 레스토랑과 바는 RH가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을 확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샹젤리제 주변의 경관과 파리의 하늘을 만끽할 수 있는 레스토랑. 내부 가구 역시 모두 RH 제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은송
자연과 햇빛이 중심이 되는 레스토랑과 달리, 어두운 조명 속에서 무드를 즐길 수 있는 바. Ⓒ이은송
이곳에서 식사와 여유, 도시를 내려다보는 시선까지 포함해 RH를 통해 구현 가능한 삶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이처럼 매장에서의 경험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브랜드는 제품의 장점이나 기능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객은 공간을 거닐고 머무는 과정 속에서, RH가 제안하는 경험과 라이프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 옆에 위치한 프라이빗 살롱을 모티브로 한 공간. Ⓒ이은송
더 많은 가구를 팔고 다양한 제품을 보여주는 대신, 공간을 통해 어떤 삶의 장면을 설계할 것인지를 질문하는 RH. 철물점으로 시작한 RH는 이제 럭셔리 홈퍼니싱을 넘어, 공간 경험과 호스피탈리티, 나아가 주거 경험 전반을 아우르는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보는 홈퍼니싱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주택 공급과 부동산 이동이 둔화되는 환경에서 홈퍼니싱 브랜드가 시장에서 경쟁력을 만드는데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