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많이 필요한 새해가 또 밝았다. 요즘은 새해에 밝은 기운과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은 노래들을 골라 새해 첫 날 플레이리스트로 만들어 듣는다고 한다. 혀 끝으로 허락받는 행복한 밥상이 병오년에도 가득하기를 바라면서 먹장금의 새해 먹부림 리스트는 나름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석쇠에 구운 불갈비와 추어탕으로 유명한 「구마산」에서 출발해 본다.
파인 다이닝이라든가 무슨 오마카세라든가 복잡한 용어들이 세상에 등장하기 전 최고로 기쁜 날의 가족 외식 메뉴는 단연코 갈비가 아니었을까. 63 뷔페와 더불어 필자에게 전망대보다 수족관보다 63빌딩의 정체성 자체였던 「루프가든」이 추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어쩐 일인지 「삼원가든」도 「벽제갈비」도 찾아볼 수 없는 여의도에서 갈비 생각이 나면 먼저 떠오르는 곳이 「구마산」이다. 높은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사라진 백조아파트 상가에 1975년에 처음 문을 열었고 2001년에 현재의 미원빌딩으로 이전하였다. 건물 2층 제일 안쪽 막다른 끝까지 찾아 들어가면 예스러운 나무현판에 「舊馬山」 상호가 적혀있다. 양반다리로 바닥에 앉는 좌식은 아니고 이제 모두 입식 구조로 편하게 바뀌었지만 가게 여기저기 정겨운 한옥 느낌이 물씬해서 방으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고 반질반질 잘 닦인 좁은 툇마루를 딛고 올라야 한다.
추어탕으로 유명한 「구마산」. 나무 현판에 가게이름이 한자로 적혀있다. Ⓒ먹장금
반 세기를 넘겨 사랑받는 맛집의 내공은 벽에 걸려있는 차림표만 봐도 느껴진다. 불갈비(국내산 한우), 추어탕(국내산 미꾸라지), 육개장(국내산 한우), 비빔밥(국내산 계란), 미더덕찜(국내산 미더덕)이 메뉴의 전부다. 단촐 명료한 음식 가짓수와 궁서체로 적혀 있어서 더 자부심 느껴지는 몽땅 국내산의 기개를 보라.
국내산 재료로 준비되는 요리들. 메뉴 구성도 단촐 명료하다. Ⓒ먹장금
이 곳은 테이블에서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 먹는 회식형 갈비집이 아니라서 현란한 집게질과 가위질의 노동 없이 주방 석쇠에서 잘 구워진 갈비가 철판 접시에 담겨 나온다. 한우 양념갈비인지라 누가 사주면 더 맛있어지는 가격대의 압박이 있긴 하지만 황금비율 간이 딱 맞는데다 적당히 달작지근하면서 윤기가 좔좔 흐르는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 야들야들 사르르 녹아 사라진다. 고기를 두고도 목넘김이 부드럽다는 표현을 써도 될까. 여린 상추에 갈비 한 점, 생마늘과 쌈장을 올려 맛을 보면 와 정녕 이 순간을 위해 출근했구나 싶어 보람차다.
적당히 달작지근하면서 윤기가 흐르는 불갈비. Ⓒ먹장금
그런데 육식맨 필자의 기준에서는 이 집의 간판메뉴가 불갈비기는 하지만 깔끔한 국물의 추어탕 맛집으로 알고 찾는 사람들이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식당을 차리신 할머니가 마산 출신이시라 상호도 지명 舊마산, 新마산 할 때의 구마산이라는데 블루리본 서베이의 추천평만 봐도 ‘여의도에서 고집스러울 만큼 옛 마산의 추어탕 맛을 이어오고 있는 노포, 담백하고 감치는 맛으로 저명 인사들이 오랜 단골로 찾는다’라며 추어탕 맛집으로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육개장도 꽤 훌륭하다. 엄밀히 말하면 서울식 육개장보다는 경상도식 얼큰한 소고기 무국에 가까운 맛인데 요즘 겨울무가 달아서인지 국물 맛이 유독 더 좋았다.
얼근한 소고기 무국같은 육개장과 시그니처 메뉴 추어탕. Ⓒ먹장금
하지만 이쯤에서 고백하건대 그렇게나 깊고 일품이라는 추어탕의 맛을 알지 못하는 필자는 항상 불갈비에 곁들이는 식사로 비빔밥을 주문한다. 손님들이 가득한 가게 안의 거의 모두가 추어탕 뚝배기를 끌어안고 감탄을 연발하는 사이에서 홀로 큼지막한 흰색 코렐 대접에 담긴 비빔밥을 받으면 뭔가 고급요리집에서 어른의 맛을 모르는 아이들용 돈까스 메뉴를 시킨 듯해 다소 열등감이 올라온다. 하지만 추어탕을 즐기지 않아 방문을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꼭 한번 시도해 보라 권하고 싶다. 「구마산」의 비빔밥이야말로 숨겨진 보물이다. 색도 곱고 식감도 좋은 호박,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 콩나물에 깨가 송송 뿌려진 계란 후라이를 올려 밥 한 공기를 쓱쓱 비벼 먹으면 오 이게 뭐지? 별 거 없는데 왜 이렇게 맛있지? 하다가 순식간에 대접 바닥을 확인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구마산」의 숨겨진 보물, 평범해보여도 한그릇 뚝딱 해치우게 하는 매력이 있다. Ⓒ먹장금
철에 따라 구성이 달라지는 반찬 구성. ‘겨울초’라고도 불리는 유채나물이 나왔다. Ⓒ먹장금
최근 방문하였을 때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된장에 무친 유채나물이 찬으로 나와 횡재하였다. 아삭한 감칠맛이 너무 좋아서 이게 무슨 나물인지 물었더니 ‘하루나’라 알려주신다. 봄철에 피는 노란색 유채꽃의 어린 줄기라고. 배 따숩고 든든하게 먹고 나니 모든 칼로리를 씻어 내려줄 것만 같은 기적의 아메리카노로 과식의 죄를 사하는 의식이 간절했다. 아니 그런데 건너편 카페에서 맞닥뜨린 신상 설향 딸기라떼의 도발이 너무 강렬했다. 요즘 또 딸기가 한창인데 옛말에도 제철 음식은 보약이 따로 없다 하지 않던가. 불갈비와 딸기라떼의 운명적인 페어링까지 마치고 나니 아아 세상 만사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기분 좋게 배부를 수 있을까, 겨울, 참 맛있고 낭만 넘치는 계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