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업무지구를 묵묵히 지켜온 오래된 빌딩에는 직장인들의 식사와 커피 한 잔을 책임지는 지하 아케이드가 있습니다. 하지만 퇴근과 함께 저녁이 되면 한산한 모습에서 왠지 모를 쓸쓸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 빌딩 아케이드에는> 시리즈는 이 적막을 깨는 온기에 주목합니다. 오랜 빌딩 아케이드를 찾아다니며 먼지 쌓인 보석을 닦아내듯 오랜 건물의 상업 공간을 잘 쓸고 닦아 새로운 유동성과 도시 풍경을 만드는 곳을 소개합니다.
오래된 빌딩의 매력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건물의 파사드부터 시작해 창문 모양, 외벽 마감재는 물론이고 ‘이제는 이렇게 못만들지’ 싶은 구석까지. 도시를 누비는 레트로 마니아들에게 오래된 빌딩은 존재 자체로 고유한 설렘을 주곤 합니다.
광화문에는 저마다의 매력과 장점을 지닌 빌딩들이 많습니다. 시청역 4번 출구쪽 통로와 맞닿은 우수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건물 이름이 주는 무게감과 특유의 중후한 ‘기세’ 탓인지 세종대로를 오가는 이들의 발길이 선뜻 닿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프레스센터입니다.
한국 언론의 상징, 한국프레스센터
과거 신문회관이 있던 터에 세워진 한국프레스센터는 언론계 공동 자금과 공익 자본이 투입돼 1985년 준공되었습니다. 당시 총 공사비로 약 400억 원이 넘게 투입된 대규모 프로젝트로, 착공 3년 만에 완공되었죠. 어느덧 불혹을 넘긴 이 빌딩은 2008년 한차례 리모델링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연면적 약 59,000㎡, 지하 4층에서 지상 20층 규모의 이 건물은 최근 지어진 CBD 권역의 프라임급 오피스들에 비하면 다소 작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종대로와 길게 인접한 구조와 도로에서 바로 보이는 넓은 입구 탓인지, 인근 SFC와 비교해도 느껴지는 건물의 중압감이 남다른 편입니다.
오랫동안 서울신문 사옥으로 쓰였던 이곳은 지난 2022년 재건축 추진과 함께 본사가 서초구 호반파크로 임시 이전하며 변화를 겪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취재와 제작을 위한 일부 인력과 한국언론진흥재단 등 언론 기관, 서울시 사무 공간 등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재건축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아직 수면 아래에 머물러 있는 상황입니다.
사진 좌측 SFC와 우측 서울시청 건물 사이에 위치한 한국프레스센터. Ⓒ시티폴리오
전형적인 CBD 권역의 오피스 빌딩이지만, 19층과 20층의 웨딩홀 덕분에 주말에도 특정 공간만큼은 유동 인구가 많은 편입니다. 얼마 전 광화문 광장에서 BTS 공연이 열린 주말에는 결혼식 하객들이 경찰 버스를 타고 이동해 검문검색을 받아야 했던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죠.
한국프레스센터의 상업 공간은 전형적인 ‘아케이드’형 입니다. 주변의 몇몇 오래된 빌딩들이 노후한 이미지를 감추려 아케이드 간판을 작게 숨기는 것과 달리, 빌딩 주변 곳곳에서 아케이드를 알리는 간판을 볼 수 있습니다. 큼지막한 간판들로 하여금 건물 주변의 직장인들의 이목을 끌려고 노력하는 편에 가깝죠.
아케이드 안내판과 간판이 건물 주변에 눈에띄게 잘 설치되어 있다. Ⓒ시티폴리오
건물 로비쪽 계단, 정면과 측면 별도 출입구를 통해 지하 아케이드로 가는 접근성 또한 무척 좋습니다. 출입구가 여러개 있다는 점에서 이 아케이드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갔을지 짐작하게 합니다.
아케이드의 상징 중 하나인 반원형 천장이 적용된 출입구. Ⓒ시티폴리오
아치와 반원형 지붕이 장식된 입구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 볼까요? 밖에서 마주한 호방한 간판들과는 대조적으로, 어쩐지 내부는 차분한 분위기이다보니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옛스러운 내부 인테리어 외에도, 한방차의 향과 함께 전통 찻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주말에는 복도가 꽤 한산했지만, 평일은 각종 언론 행사와 방문객이 많은 탓에 언론인과 방문객이 계속 오고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비교적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게들이 많아, 방문객의 연령대 또한 꽤 높다는 점도 알 수 있죠.
한국프레스센터 지하 1층 아케이드 복도. 어딘가 도쿄의 오랜 빌딩과 비슷한 느낌이 나기도 한다. Ⓒ시티폴리오
평일에는 빌딩과 주변을 오가는 어르신들의 사랑방이 되기도 하는 전통 찻집. Ⓒ시티폴리오
‘요즘 애들’이 찾는 찻집, 아케이드 토오베
연식이 느껴지지만 잘 관리된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붉은 카펫이 깔린 뜻밖의 찻집, 아케이드 토오베가 보입니다. 이곳엔 주변 가게들과 눈에 띄게 다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벽에 붙은 조그마한 종이 메뉴판이 간판을 대신한다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매장 앞 간이 의자에 놓인 웨이팅 시스템입니다.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난 만큼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대기가 이어지는데,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의 연령대를 감안하면 원격 줄서기 방식을 도입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와중에 아날로그 감성이 짙은 공간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는 패드형 웨이팅 기기를 준비해둔 것이죠.
한국프레스센터 지하 1층 아케이드에 위치한 아케이드 토오베. 우측 대리석 벽에 붙은 2장의 메뉴판. Ⓒ시티폴리오
투명한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면 찻집 답게 차를 내리는 공간이 방문한 이들을 환대합니다. 아케이드 토오베는 2021년 겨울 종로에서 시작된 찻집, 토오베의 두 번째 매장입니다. 사실 토오베가 처음 문을 열 때만 하더라도 국내 F&B 시장에서 ‘차’는 그리 환영받는 종목이 아니었습니다. 저가 커피 브랜드가 늘어나며 커피 소비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직접 찻잎을 우려 마시는 경험을 제공하는 찻집이나 티룸은 찾아보기 힘들었죠. 티백을 활용한 메뉴나 밀크티 전문점을 제외하면 차는 시장에서 소위 비주류였습니다.
인근 SFC 몰 지하의 프랑스 티 브랜드 ‘다만 프레르’가 문을 연 2015년에는 지금처럼 웨이팅을 할 만큼 붐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매력이 있는 곳이었죠. 2020년만 하더라도 종로부터 중구 인근에서는 덴마크 티 쇼룸 ‘에디션덴마크’ 정도가 추천할 만한 티 전문점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차 내리는 공간. 전통적인 다기들이 미니멀한 메탈 소재 인테리어와도 잘 어우러진다. Ⓒ시티폴리오
커피가 절대적이었던 F&B 시장에 조금씩 찻내음이 불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최근 전 세계적인 말차 열풍과 더불어 차를 중심으로 한 브랜드들이 서울 곳곳에 등장하고 있죠.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음료나 메뉴 형태로도 다양해지고 있지만, ‘차 문화’ 자체를 즐기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입니다. 웰니스 트렌드와 맞물려, 치열한 일상 속에서 한 끗 다른 감각과 휴식을 찾는 MZ 세대에게 찻집이 인기를 끄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릅니다.
차 문화를 감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토오베의 두 번째 매장인 아케이드 토오베. Ⓒ시티폴리오
매장 내부는 무게감이 있는 붉은 카펫과 짙은 고동색의 가구로 꾸며져 있습니다. 최근 트렌디한 F&B 매장에서 유행하듯 디자이너 가구를 들여놓다 보니 어디를 가도 익숙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이곳은 공간의 콘셉트를 선명하게 하는 가구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낮은 소파의 높이와 두툼한 볼륨감, 그리고 옛날 택시 좌석을 연상시키는 흰색 소파 커버까지. 인테리어 요소들을 최소화 하면서도, 레트로한 감각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센스가 돋보입니다.
붉은 카페트와 레트로한 무드의 가구들. Ⓒ시티폴리오
앤티크 가구에서 볼 수 있는 글로시한 광택과 불규칙한 무늬의 나무장. 뮤지엄을 연상시키는 디스플레이도 인상적이다. Ⓒ시티폴리오
메뉴판에서도 레트로 컨셉과 디테일을 챙겼다. Ⓒ시티폴리오
차의 맛은 내리는 과정이나 숙련도에서도 차이가 생기지만, 다구를 포함한 상차림과 차를 마시는 일련의 과정에서도 큰 차이가 만들어집니다. 토오베에서는 주로 대만과 중국 차를 즐길 수 있는데, 차의 맛과 향을 다기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게끔 합니다.
달콤한 복숭아 향이 매력적인 피치 우롱은 사랑스러운 분홍빛 찻주전자에 담겨 나오고, 상큼하고 산뜻한 베르가못 우롱은 그 청량함이 고스란히 비치는 투명한 찻주전자가 뚜껑 없이 제공됩니다. 다구까지도 그 차가 품은 무드와 닮은꼴로 맞추어 내는 디테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차의 특징, 맛과 향에 맞춰 나오는 다기들. Ⓒ시티폴리오
차 문화에서 티푸드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마치 음식 모형같은 정갈한 이곳의 디저트는 맛과 멋을 동시에 챙긴 토오베의 공간을 쏙 빼닮았습니다.
상큼한 레몬 젤리는 입안을 개운하게 정돈하면서도 말캉한 식감으로 씹는 재미를 더합니다. 한 폭의 설산을 옮겨놓은 듯한 딸기 보늬밤 토스트는 요즘처럼 쌀쌀한 바람이 부는 계절과도 제법 잘 어울리는 티푸드입니다. 예스러운 모양새의 크림과 적당히 구워진 빵이 어우러져, 한 입 베어 물면 마치 소복한 눈길을 밟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착각마저 듭니다. 한입 한입이 아쉬울 정도죠.
‘오피스 빌딩 카페’ 하면 스타벅스나 투썸플레이스가 정답이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주요 권역의 대형 빌딩들은 보장된 매출과 인지도를 우선하며, 별도의 마케팅 없이도 집객이 원활하게 되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선호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1~2년 사이 대형 빌딩에 들어가는 카페 브랜드들이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자본력을 갖춘 F&B 기업들이 늘어난 영향도 있겠지만, 빠르게 부상하는 신생 브랜드들이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건물의 얼굴과도 같은 1층 자리를 적극적으로 선점하기 때문입니다. 빌딩 측에서도 오피스와 상업 공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익숙한 대형 프랜차이즈 대신 신선한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일종의 공간 브랜딩 전략을 취하기도 합니다.
공간 밖에서도 노출되게끔 공간 출입구 주변으로 사이니지를 설치한 모습. Ⓒ시티폴리오
모두가 노출이 잘 되는 빌딩 1층을 탐색할 때, 누군가는 오래된 빌딩 구석을 찾아 다니기도 합니다. 토오베가 한국프레스센터 지하 1층 아케이드에 둥지를 튼 것처럼 말이죠. 이들은 매장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요소를 오히려 브랜드와 공간 컨셉으로 영리하게 치환합니다. 차 문화가 여전히 전통과 시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영역임을 떠올려 보면, 40년 세월을 머금은 이 빌딩의 아케이드는 어쩌면 찻집인 토오베에게 최적의 입지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작은 찻집에서 발견한 변화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CBD에서도 중심에 있어 입지가 좋은 곳임에도 방문객의 연령대가 높고 주말이면 고요해지던 한국프레스센터 지하에 젊은 소비자가 유입되고 공간에 새로운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켜켜이 쌓인 공간의 매력을 MZ 세대가 즐길 수 있게 차문화와 연결하고, 오래된 건물의 숨겨진 매력과 가치를 다시금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이 아케이드의 변화는 유의미합니다.
언젠가 이 빌딩이 재건축되기 전까지, 주말의 고요함을 깨고 활기를 더하는 찻집이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합니다. 낡은 복도 끝에서 마주하는 차 한 잔의 여유가 오랜 빌딩 아케이드의 새로운 일상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이은송
서울프라퍼티인사이트 콘텐츠 매니저
시티폴리오 콘텐츠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도시와 건축, 공간과 브랜드가 교차하는 이야기를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