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장미아파트 상가 2층에 위치한 「장미의 집」. Ⓒ먹장금
세월이 누운 낡은 시간의 문을 열면 오래된 빛깔의 나무 테이블과 각진 등받이가 달린 의자, 왠지 교실 걸상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의자들이 빼곡한 내부 공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 MBC가 상암과 일산으로 떠나기 전엔 밤샘 촬영한 방송국 사람들이 이른 점심에도 소주잔을 기울이며 뒤풀이도 하고 운이 좋으면 TV에서 보던 셀럽들을 힐끔 볼 수도 있었는데 이제 오가는 사람들은 달라졌지만 편하고 부담 없는 분위기도 음식맛도 여전하다.
먼저 필자의 최애, 이 집의 No.1 메뉴는 고추장 불고기이다. 제육볶음의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맛과는 또 다르게, (물론 그것도 매우 맛있지만) 얇게 썬 돼지고기를 양념에 재워 숙성시켜 나오는데 탈 듯 말 듯 불맛나게 구워 웰던으로 바싹 구운 쪽마늘과 함께 깻잎쌈에 올려 한 입 하면 그 촉촉하면서 달큰하고도 깊은 맛에 공기밥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고추장 불고기라고 해서 혹시나 텁텁한 고추장 양념 범벅으로 오해하고 피한다면 그대 인생의 손해다. 분명 1인분에 230g인데 체감상으로는 비빔면 1봉의 느낌이다. 1.5인분은 구워야 정량 1인분같은 억울한 느낌이랄까.
쪽마늘, 김치와 함께 불판에 구워 먹는 고추장 불고기. Ⓒ먹장금
물론 「장미의 집」은 냉동삼겹살로 더 유명한 곳이다. 하기야 얼린들 안 얼린들 된장에 박든 와인에 숙성하든 지글지글 삼겹살이 맛 없기가 더 힘든 법이지만 역시 돌고돌아 순정이라고 1등급 암퇘지 고기를 급랭한 냉삼과 잘 익은 김치의 조합이란 익히 아는 맛이라 더 감동적이다. 맛깔난 김치를 삼겹살 기름에 구워 먹을 천재적인 발상을 최초로 하신 조상님이 누구일까? 이런 게 바로 신재생 에너지 사업인가. 특히 삼겹살 구이판에서 다시 태어날 김치와 그냥 찬으로 먹는 시원하고 깔끔한 김치를 따로 구분해서 주는데 사실상 장미의 집이 아니라 김치의 집이라 해도 될 만큼 둘 다 맛이 좋다.
「장미의 집」 대표 메뉴, 냉동삼겹살. 삼겹살 기름에 김치를 꼭 함께 구워먹어야 한다. Ⓒ먹장금
김치 맛이 보장되는 만큼 다 먹은 고기 판을 치우고 김치와 궁합이 딱 맞는 시원한 멸치국수나 물김치국수로 개운하게 입가심을 하면 그야말로 완벽하다. 점심메뉴로 8천원에 제공되는 김치찌개도 있는데 오늘은 가볍게 부족한 듯 먹자고 가서 라면사리까지 넣어서 넉넉하게 먹고도 옆 테이블에서 풍겨오는 냉삼의 도발을 이기지 못하는 바람에 후식 먼저 먹고 고기를 나중에 구워 먹는 특이한 사람이 된 적도 있다. 어떤 날엔 혼자 온 손님이 당당하게 김치찌개 1인분을 시켜 가스버너에 보글보글 끓여 먹는 게 아닌가. 바쁜 직장가 점심시간에 끓여먹는 찌개 혼밥 가능한 귀한 곳을 득템한 것 같고 뭔가 미담 같고 마음이 훈훈했다.
후식으로 먹는 뜨끈하면서 개운한 멸치국수. Ⓒ먹장금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꽃피는 사월이라 연분홍 꽃잎이 흩날려 바닥에도 벚꽃이 가득했다. 아파트 외벽에 내걸린 재건축 진행 현수막들을 보며 문득 교과서에서 봤던 채석장을 맴도는 성북동 비둘기가 떠오른다. 구석구석에 잘 숨겨진 이런 노포 맛집들도 새 집과 함께 무사히 잘 돌아올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나 물가는 치솟았는데 고리짝 시절 생각만 하고 ‘생고기도 아닌 냉삼인데 너무 비싸’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별별 오마카세, 파인다이닝까지 갈 것도 없이 고급 고깃집에서 먹는 돌판 짜파게티 2봉, 파스타라 이름 붙은 국수 한 접시에는 서슴없이 2~3만원을 털리는 필자의 가성비 기준이 확실히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벛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걸어가 아무 때고 먹을 수 있는 노포의 낭만을 누릴 수 있을 때 최대한 누려 봐야겠다. 나중에 그리워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