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글로벌 선진 리츠 시장(FTSE EPRA Nareit REITs 지수)은 -24%의 하락폭을 보이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부진한 성과를 기록했습니다. 주요 지역 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유럽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부진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독일 시장이 -50% 이상 하락하였습니다. 폭락세를 보인 독일 리츠 시장(FTSE EPRA NAREIT Germany 지수)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지수 비중 87%가 레지덴셜 섹터이고 해당 섹터 대부분 종목의 주가 성과가 크게 부진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국가의 리츠 지수에서 단일 섹터가 이렇게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 자체도 특이하며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 평가받는 레지덴셜 섹터가 폭락세를 기록한 점도 이례적입니다.
FTSE EPRA/NAREIT 지수에 편입되어 있지만 사실 리츠는 아닙니다
독일은 법적으로 지나친 주택가격 및 임대료 상승을 막기 위해 리츠가 2007년 이후 지어진 주거용 자산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사실 법적 규제 때문에 독일 리츠 지수 레지덴셜 섹터에 있는 기업들은 EPRA의 회원이긴 하지만 리츠가 아닌 일반 부동산 운영 기업입니다. 리츠가 아니기 때문에 리츠가 받는 대표적인 인센티브인 법인세 면세 혜택도 없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리츠라고 표현하겠습니다.
독일에서 주거 리츠가 이렇게 대형화 되어있는 이유
독일은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전체 주택의 20%가 파괴되어 전후에 심각한 주택 부족 현상에 시달렸습니다. 주택 부족난을 해결하고자 독일 정부는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하는 동시에 민간 주택건설업체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저렴한 임대주택을 운영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주택정책으로 임대주택이 오늘날까지 보편적인 주거형태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독일의 주택 자가 보유율은 49.5%인데 이는 모든 OECD 국가에서 두 번째로 낮은 수치로 그만큼 임대주택에 살고 있는 비율이 높아 대표적인 임차인 사회입니다. 특히 베를린, 함부르크 같은 독일 주요 도시는 임대주택 거주율이 각각 83%, 76%로 높아 도시 시민 대부분이 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일 정부의 공공임대주택 민영화 역시 주거 리츠의 양적 성장에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를린시는 과거 동베를린 지역 주택 39%, 서베를린 지역 주택 24%를 직접 소유하고 있었는데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시의 부채가 늘어나자 공공임대주택 약 20만채를 민간기업에 매각하며 민간기업의 자산 포트폴리오가 급격하게 성장하였습니다.
독일 주거는 2021년까지 가장 높은 성과를 기록한 섹터 중 하나
독일의 총인구는 출산율 저하로 인해 2004년을 정점으로 2010년도 초까지 감소세를 보였고 경기둔화로 2005년까지 실업률이 상승추세를 보였기 때문에 주택가격이 장기침체로 접어들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난민 수용과 신규 이민자 유입으로 경제활동인구가 급격히 반등하며 지난 10년 간 주택가격과 임대료가 폭등하였습니다. 주거 리츠 입장에서는 정부의 부동산 시장 오판으로 인하여 정부로부터 비교적 싼 값에 매입한 자산의 가치가 폭등하고 임대수익도 상승하는 혜택을 누린 것입니다.

Vonovia 상장 이후 주가 추이

주거 리츠의 대표적 기업은 독일 주식시장 시가총액 순위 20위 권 내에 위치한 초대형주 보노비아(Vonovia)입니다. 독일 내에서만 임대주택 35만 세대를 보유한 보노비아는 2013년 상장 이후 2021년까지 연평균 총수익률이 무려 +17.3%에 달하며 유럽 내에서도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리츠 중 하나입니다. 꾸준한 임대수익 성장과 외형 확대에 따른 효율성 증대에 힘입어 2013~2021년 기간 동안 연평균 배당금 성장률이 +15.11%에 달하였습니다.
2022년 주가 폭락, 견고한 펀더멘털의 역설
의식주와 관련된 임대주택 특성 상 펀더멘털이 다른 상업용 부동산 대비 상대적으로 견고한 경향을 보입니다. 보노비아의 상장 이후 공실률 역시 2% 초반 수준에서 꾸준히 유지되었고, 평방미터당 임대료는 한해도 빠짐없이 상승세를 기록했습니다.

이익의 견고함과 안정적인 성장성은 주식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보노비아는 안정적 이익 구조를 기반으로 2022년 초 내재 자본환원율이 약 1.75% 수준에서 거래되었습니다. 국내 투자자에게 이 정도 수준의 지표는 너무 낮게 보일 수 있어도 당시 독일의 마이너스 국채 금리 수준을 생각한다면 합당한 수준의 밸류에이션이었습니다.
독일 10년물 국채금리 추이

그러나 작년 물가폭등 현상이 나타나며 중앙은행들의 강력한 긴축정책이 실시되자 국채 금리도 급등하였습니다. 이에 주식시장은 보노비아의 주가를 -50% 가량 하락 시켜 내재 자본환원률을 국채 금리 대비 100베이시스포인트(bp) 가량 높은 수준인 3.5%로 조정하였습니다. 국채 금리 상승은 모든 투자자산에 부정적으로 작용하는데 마치 채권의 볼록성처럼 높은 밸류를 받는 자산, 다시 말해 일드가 낮은 레지덴셜 섹터가 금리 폭등에 더 취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임대료 규제 정책
추가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제한된 독일 임대주택의 임대료 상승률 역시 부정적 요소였습니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 임대료가 2배 가까이 상승하자 독일 연방정부는 Mietpreisbremse(Rent Control)이라 불리는 임대료 상승 규제 정책을 도입하여 임대료가 지역 임대료 인덱스의 10%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습니다. 상승이 완전히 제한된 것은 아니지만 임대료 인덱스가 최근 6년 평균 임대료로 계산되기 때문에 상승 지연 효과가 있습니다. 따라서 10%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명목상의 임대료는 상승하지만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질 임대료는 오히려 감소하는 효과가 나타나 투자자에게 인플레이션 헷지 기능을 제공하지 못하게 됩니다(보노비아의 최근 연간 임대료 상승률은 +3.3% 수준입니다). 참고로 기존 주택에 대해서는 강한 임대료 규제 정책을 운영하지만 신규 주택의 임대료는 시장 자율에 맡기고 있어 주택 공급 부족 시장에서 리츠들은 적극적인 신규 개발을 통한 이익 성장을 추구해왔습니다.
가장 안정된 펀더멘털 vs 가장 금리에 민감한 주가
독일 정부는 규제 정책으로 임대료 상승을 억제하려 하지만 공급이 제한된 가운데 나타나는 수요의 증가는 결국 가격상승으로 귀결됩니다. 독일에서 IT, 스타트업 기업들의 성장은 도시화를 가속화하고 있어 신규 개발이 어려운 도심지의 임대료는 상승세가 더 가파릅니다. 이에 독일 지방정부는 2020년 극단적으로 임대료 동결법(Mietendeckel)을 발의하였지만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상황으로는 임대료는 꾸준히 상승할 것이고 주거 리츠의 이익 역시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앞서 언급한 채권의 볼록성과 같이 일드가 낮게 형성된 주거 리츠는 작년 채권금리 상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여 작년 가장 크게 하락하였고 올해 1월 금리하락에 다시 민감하게 반응하며 +17.14% 상승하여 글로벌 리츠 섹터 중 가장 높은 성과를 보였습니다. 올해도 주택 공급이 제한되어 안정적인 펀더멘털이 상수에 가깝다면 향후 금리 향방에 따라 주거 리츠의 주가 움직임이 가장 다이나믹하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