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마음만은 저속노화 식단의 시대를 살아가기에, 고탄고지 빌런 그 자체인 중국음식점에 가기 위해서는 나름 용기가 필요하다. 2주 만에 놀랍게 감량시켜 준다는 기적의 양배추 요리 숏츠와 릴스를 수십 개씩 보던 어느 날, 마치 실제로 2주간 채소찜과 샐러드만 먹은 사람처럼 탕수육과 간짜장이 간절해졌다. 그렇다. 쿨타임이 찬 것이다. 예전에는 몰랐던 취나물의 향취를 알고 생선 매운탕이 아닌 지리의 맑고 시원함을 알고 이제는 제법 어른의 입맛이 된 듯 우쭐하다가도 혈중 짜장 농도가 희박해지면 간짜장 너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길 막힘 걱정 없이 갈 수 있는 간짜장 잘하는 집들을 AI보다 빠르게 읊을 수 있지만 무릇 사자가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행여나 새로운 집을 놓칠까 큰 기대 없이 검색창을 열었다. 어라?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모두가 익히 아는 맛집들 사이에서 처음 듣는 이름을 만났다. ‘호화대반점? 뭐야 호화반점 짭이야? 그 옛날 압구정 갤러리아 건너편 골목에서 영양센터를 마주하고 있던 그 <호화반점> 친척이야? 주문하고 컵에 물을 따르자마자 곧바로 탕수육이 탁자에 날라져 오던 그 집?’ 호기심과 사명감이 끓어올라 바로 검증 차 방문했다.
유리로 된 아치형 천장 아래 좁게 뻗은 상가 계단을 내려가서 한 번 꺾어지면 바로 목적지다. 마치 승부를 앞둔 쿵푸팬더처럼 빼꼼 들여다보며 살짝 불안해졌다. 전형적인 노포 맛집의 외관인데 그동안 불철주야 가동해 온 먹레이더에 전혀 잡히지 않은 맛집이 이토록 가까이에 심지어 여의도 안에 존재할 수 있다고?

여러 의미로 눈길을 사로잡는 호화대반점 외관 ⓒ여의도 먹장금
일단 첫인상은 만두를 파는 중국집이다. 만두 사랑 필자의 편견에 따르면 중국 음식점은 만두를 파는 중국집과 딤섬을 파는 중국집 두 가지로 나뉜다. 요즘 무려 3만 원을 넘기기 시작한 한우 트러플 짜장면집들은 대부분 쉐프가 빚는 딤섬을 팔고, 아직 가슴이 수긍하는 가격의 중국집들은 주방장이 빚는 만두를 판다. 역시나 일일 수량이 한정된 수제 군만두 메뉴가 벽에 붙어 있다.

바삭한 만두를 한 입 베어물면 육즙이 퍼지는 겉바속촉의 정석 ⓒ여의도 먹장금
간짜장을 먹고 싶어서 왔지만 사실 이 간짜장은 단독 식사 메뉴를 뜻한다기 보다는 (탕수육과 깐풍기를 먹은 다음에) 간짜장을 먹고 싶다는 복합적이고 외교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집합명사이다. 순리대로 탕수육과 깐풍기 그리고 간짜장을 주문했다. 평범한 단무지와 짜사이가 세팅 되고, 다른 테이블 사람들은 주로 뭘 먹는지 염탐할 새도 없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아아 빙고!! 가까운 시일 내 재방문이 확실시되는 식당을 새롭게 발견하는 이 희열이란!'
탕수육은 작은 사발에 건더기 없는 소스가 담겨 나오긴 하지만 고기튀김처럼 소금을 찍어 먹는 스타일이다. 찍먹 부먹 따위 구분할 필요도 없다. 조심스럽게 첫 입을 베어 물고, 와 정말 주방에 숨어 계신 무림 튀김 고수를 향해 합장할 뻔했다. 개인적으로 촉촉한 육즙 탕수육보다는 바삭 탕수육파로서 마치 솜사탕 피로 감싼 듯 얇고 보들하게 튀겨져서 바삭한데 또 쫀득한 맛이 실로 만족스러웠다.

두툼한 고기와 얇은 튀김옷이 인상적인 탕수육 ⓒ여의도 먹장금
게다가 기대 이상의 탕수육에 절대 뒤지지 않는 대박 깐풍기! 이것은 유린기인가 양념치킨인가? 닭고기로 빚어낼 수 있는 최애 중식 메뉴 중간쯤에서 어떻게 이런 황금 밸런스를 찾아냈지? 가히 <호화튀김대반점>이 아닌가. 나중에 수 차례 재방문 끝에 맛본 팔보채, 깐소새우, 잡탕밥, 볶음밥, 짬뽕 등등 대부분의 메뉴가 평균치를 웃돌며 훌륭했지만 이 깐풍기는 자칫 눅눅해질 수 있는 양념을 이겨낸 강력한 바삭함과 과하지 않은 달달함의 조화가 정말 혀에 딱 앵겨 와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바삭함과 달달함의 조화가 기막힌 깐풍기 ⓒ여의도 먹장금
아쉬운 점은 처음에 몽땅 주문한 탓에 정작 오늘의 명분 간짜장은 메인 요리에 밀려 짜게 식어간 후에야 맛을 보게 되었다. 아니 근데 식었는데도 이렇게 맛있으면 정말 찐사랑이 아니겠는가. 일반적인 간짜장처럼 달달 볶아서 면과 따로 나오지 않고 짜장을 면 위에 올려 나오는 게 특이했는데 결론적으로 간짜장도 역시나 필자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주인장께 여쭤보니 이 건물 지하 자리에 계속 중국집이 들고 났지만 지금의 <호화대반점>이 문을 연 건 6년 전이라고 한다. 이럴 수가. 무려 6년이나 이렇게 취향 저격인 중국집이 실존하는 멀티 유니버스를 몰랐 다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없다.
여의도에는 화려한 마천루의 위용을 자랑하는 신축 빌딩에 잘나간다 싶은 핫플이 늘 새로 입점하고 있고, 한편으로 이게 언제 지어진 건물인가 싶은 허름한 상가의 지하 미로에 아는 사람들만 아는 맛집들이 여전히 공존한다. 그 수많은 간판들과 뻔한 여의도 밥집들을 눈 감고도 줄줄 꿴다 자신했건만 바로 등잔 밑에 존재해 왔던, 하지만 완벽하게 몰랐던 낯선 상가에서 소울푸드를 발견한 기쁨이 참으로 장했다. 누군가 필자에게 “그래서 서울 시내 최고의 간짜장인가요?”라고 물으면 자신 없다. 하지만 적어도 누가 뽑았는지도 모를, 그리고 무엇보다 나머지 두 집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서울 3대 짬뽕류 홍보를 믿는 거보다는 분명 가 볼 만한 집이니 한 번 탐험해 보시라 권해 본다.
이제 냉장고 야채칸에서 시들고 있는 양배추들만 남몰래 처리하면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다.
“괜찮아. 먹으면서 기분 좋고 행복했으니 짜장면은 정속노화 식단이야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