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는 산책하기 좋은 도시입니다. 차를 타는 것 보다 걸어서 볼 때 도쿄만의 고유색이 진하게 느껴지는 곳이 많습니다. 특히 벚꽃 시즌이면 동네마다 대표적인 산책로가 있고, 저마다 자기들의 동네가 제일이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고작 한주 정도인 그 시즌에 각자의 동네로 초청하기 바쁘고, 꽃이 떨어지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보려 애를 씁니다. 각자의 동네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서인지 굳이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는 생각 없이 살던 곳에 살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가 봅니다.
그럼에도 도쿄에서 자주 이사 다녔던 국외거주자(expatriate)뿐 아니라 관광객, 도쿄인 등 여러 그룹에서 산책하기 가장 좋은 동네로 꼽는 지역이 있습니다. 바로 다이칸야마입니다. 다이칸야마에 한번이라도 거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동네의 좋은 점들이 충분히 숙지된 후에도 다이칸야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 갑니다.
다이칸야마라는 지역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T-site겠지만, 그 전에 이 동네를 다이칸야마답게 성장시킨 터줏대감격 상업시설이 있습니다. 317 구야마테 도리를 따라 흩어져 있는 14개 동의 저층 상업시설, 힐사이드 테라스입니다. 처음 개발된 A, B 동의 오픈이 1969년이고, 마지막 웨스트 동이 문을 연 것이 1998년이었으니 약 30여년에 걸쳐 서서히 개발된 동네 리테일의 전형입니다. 도쿄에는 30년에 걸쳐 진행된 개발 프로젝트들이 유난히 많지만, 보통 대형 프로젝트로 토지 작업 등에 많은 시간을 기울이는 경우입니다. 힐사이드 테라스는 조금 다른 사례입니다. 오너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동네와 소통하며 한땀 한땀 개발한 상업시설이죠. 모든 동이 문을 연 후로 25년이 더 지났으며, 메인 동의 상업시설이 운영을 시작한 것은 약 50년이 되어오지만, 힐사이드 테라스는 여전히 다이칸야마를 대표하는 현재형 상업공간입니다. 어떤 운영 전략과 이 곳만의 차별점이 있는 것일까요?

저층을 고집해 동네 산책 기반을 만든 상업시설 힐사이드 테라스 ⓒhillsideterrace.com
첫 번째 요인. 비워두기
다이칸야마를 그리워하는 필자의 아들에게 다이칸야마가 좋은 이유를 가끔 묻곤 합니다. 에비스부터 걸어 다니던 아들은 촘촘하고 빽빽한 회색 빛의 거리를 걷다가 얕은 언덕을 올라 시작되는 다이칸야마부터 마치 캘리포니아 같다고 표현합니다.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를 물으면 건물들이 낮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서울에도 낮은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은 있잖아’라고 되물으면 마지막으로 곰곰히 생각해보더니, ‘서울에는 그런 곳이 잘 없지. 낮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있는 것이지 여유롭게 있는 건 아니니까. 낮은 건물들 사이에 간격을 둔 다이칸야마 지역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고 표현합니다. 중학생 아이의 눈에도 차별점이 인지되나 봅니다.
아들이 다이칸야마의 여유를 느끼기 시작한 곳이 힐사이드 테라스의 A 동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서울 아파트의 동간 거리를 고민하듯 꽤 넓은 상업시설의 동간 거리에 여백의 미를 담아넀고, 이는 다이칸야마의 정체성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개발이 시작될 때 10 m의 고도제한 덕분에 건축물이 3층 높이로 지어지기 시작했고, 이후 고도제한이 완화된 후에도 기존 건축물과 높이를 맞추었습니다. 이렇게 비워둔 공간의 부유함이 각박한 도시생활 목마름을 씻어주는 생명수 같습니다. 또한 여백의 공간에 녹음을 가득 채워 빛이 좋은 날이면 이 곳을 산책하는 것 만으로 온 몸이 정화되는 듯합니다. 이런 기준들은 T-site 뿐만 아니라 그 후의 다이칸야마 상업시설 개발에 구심점이 되어주었습니다.
일본은 지난해 여덟 번째 프리츠커상을 수상하며,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중 두번째 프리츠커상의 주인공인 마키 후미히코가 오너와 협의를 거듭하고 동네와 소통하며 30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한 공간이 힐사이드 테라스입니다. ‘여백의 미’를 담은 도심 속 작품이 탄생한 것이죠. 상업시설 개발을 해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이런 여백은 건축가의 고집뿐만 아니라, 자본의 관대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단기 수익을 매번 리포트 해야 하는 펀드가 주체인 경우엔 이런 오랜 기다림의 용기는 시도조차 해볼 수 없는 경우가 많죠. 작품이 될만한 그림이 나올 수 있는 순간마다 각자 수익에 대한 입장 차이로 현실화되지 않는 장면을 경험하며, 서울에서 필자가 느꼈던 고통스러움과 안타까움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제는 서울에서도 조금씩 다른 접근법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그 이야기가 그렇게 기쁩니다.

낮고 간격이 넓은 건축물이 주는 여유로움이 동네의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hillsideterrace.com
두 번째 요인. 한꺼번에 다 보이지 않는 공간 절제의 미학
다이칸야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매일 힐사이드 테라스를 지나다닙니다. 매일 보아도 매일 새롭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단조롭지 않은 상업시설 디자인 덕분에 매일 새롭게 보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살짝 높인 보행자용 데크 위로 오르는 날이 있고, 한가운데 지붕을 날리고 뚫어둔 중정 광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날이 있고, 구석에 숨겨둔 공간, 지하에 숨겨둔 공간 등 들여다보아야 그제서 아름다움이 보이도록 설계된 공간들이 있습니다. 이에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지나치는 날이 있고 머물게 되는 날이 있어서 몇 년을 살아도 상업시설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특히 벚꽃 시즌이면 B동 어딘가에서 커피잔의 달그락 소리,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메인 도로에서 보이지 않지만, B동 가까이 들어서서 벚꽃 나무에 근접하게 되면 그 아래 숨겨진 야외 테라스가 조금씩 보입니다. 꽃가지들이 드리워진 아름다운 모습이 인상적인 이 곳은 B동 지하에 위치한 ‘파숑’이라는 프렌치 레스토랑입니다. 객단가가 꽤 높은 식담임에도 계절이 좋은 날에는 테라스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그 계절의 아름다움이 숨겨진 야외 공간을 한껏 즐기곤 합니다.

도로에서 보이지 않는 파숑의 테라스. 사이니지와 간헐적인 담소 소리만 들린다. ⓒ노윤영

힐사이드 테라스 안쪽으로 들어서면 그제서야 한층 낮게 배치된 파숑의 테라스를 볼 수 있다. ⓒ노윤영
오래 이 곳을 지나다닌 사람들도 T-site를 가느라 바빠 훅 지나치기 쉬운 지하 공간도 있습니다. G동의 힐사이드 팬트리입니다. 제법 큰 공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지하에 숨겨져 있는지, 거주 1년이 지난 어느날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입구가 되는 계단 앞 조그마한 사이니지를 그냥 지나칠 경우 매일 그 앞을 지나다녀도 영원히 숨어있는 공간을 알 수 없도록 감춰두었습니다.
지하에 내려가면, 그제서야 매장의 존재가 느껴집니다. 마치 유럽의 어느 델리를 그대로 뚝 떼어 온듯합니다. 빵 굽는 내음, 간단한 델리메뉴, 잔뜩 진열된 이태리 프랑스 와인들, 식재료들, 약간의 신선한 유기농 야채 판매대, 에스프레소 커피 스탠드, 빠질 수 없는 젤라또 아이스크림 쇼케이스 등이 무심한 듯 각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항상 만석인 다이칸야마의 스타벅스 매장과 달리, 기대보다 테이블수가 많아 언제든 앉을 자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단골 고객들을 위한 비밀스러운 배려의 공간 같기도 합니다. G동의 출입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이런 공간의 분주함이 지하에 숨어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G동 전면에서 전혀 가시성이 없는 지하에 숨겨둔 유럽식 델리, 다이칸야마 팬트리 매장 내부 ⓒ노윤영
세번째 요인. 동네와 동행하는 테넌트 유치의 진정성
힐사이드 테라스가 운영된 지 50년이 넘었습니다. 2019년 대대적인 50주년 기념 행사를 한 후, 다시 6년이 흘렀습니다. 많은 테넌트들이 그 시간을 함께 지켜왔습니다. 테넌트의 변경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하나의 테넌트가 변경될 때는 마치 깊은 연구를 하듯 동네와 함께 호흡할 곳을 찾아내기에 진심입니다.
다이칸야마는 의외로 오래 영업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권입니다. 수많은 브랜드들이 단기간의 영업으로 막을 내리고 떠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다른 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브랜드, 특별히 다이칸야마에서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 브랜드들이라면 외면당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폴 스미스와 사라베쓰 키친, 유나이티드 애로우의 대형 매장도 떠났습니다. 이곳만의 고유함, 그 브랜드만의 고유함을 담아 영속성을 갖지 않은 브랜드들은 장시간을 버텨내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반면, 힐사이드 테라스의 테넌트들은 상업시설과 그 생을 함께 하는 듯합니다. C동에서 톰스 샌드위치가 문을 닫을 때 모두들 너무 아쉬워하였는데요. 41년생 창업자가 3년간의 뉴욕 생활에서 받은 샌드위치에 대한 인상을 다이칸야마 지역에 전달하기 위해 73년에 오픈했던 가게입니다. 46년을 한 영업주가 지속적으로 영업을 해온 거지요. 최근에는 더 콘란 숍이 F동에 오픈하였습니다. 아자부다이힐즈, 마루노우치, 니시신주쿠 파크하얏트 저층부에 위치한 콘란숍과는 완전히 차별화하였습니다. 런던의 느낌을 어디에도 두지 않은 온전히 일본의 색채를 가득담은 라이프스타일 숍으로 컨셉을 달리한 것입니다. 각 동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동네의 색을 칠하고 있는 테넌트들은 수가 많지 않아도 각자 맡은 카테고리에서 오랜 시간을 견딘 체력 좋은 선수들입니다.

사이니지를 가리면 도쿄 전형의 라이프 스타일 편집숍으로 보여지는 더 콘란샵 다이칸야마 ⓒ노윤영
네번째 요인. 커뮤니티를 만들고 소통하기
건축미와 테넌트의 유치를 성공적으로 한 상업시설이라도, 운영의 지속성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경우 10년 영업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힐사이드 테라스는 50년을 훌쩍 넘겼으니, 상업시설 운영주체의 노력들이 고스란히 그 시간들에 담겨있습니다.
주말과 관계없이 모든 날 동안 커뮤니티를 위하여 고민하는 모습입니다. 날이 좋은 주말은 어김없이 비워둔 공간마다 동네 상점들을 모아 플리마켓이 열리고, 갤러리는 상시 전시중이며, 때마다 연주회를 잊지 않고 주최합니다. 디자인공모를 통한 신진 건축가 발굴, 전문가들이 셀렉트한 전문 서적을 갖춘 멤버쉽 라이브러리도 운영합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메세나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운영의 컨셉을 물으면 ‘네버 엔딩 스토리’라고 표현하는데요. 목표를 정하지 않은 끊임없는 소통을 통한 시행착오로 설명합니다. 엔비디아 창업주 젠슨황의 졸업연설 중에 인용된 ‘은각사의 정원사’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인데요. 드넓은 이끼정원을 아주 자그마한 핀셋으로 25년간 정리하며 여전히 시간이 많다고 하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양동근이 결혼생활 노하우를 이야기하면서, 12년을 아내에게 야단맞아도 아직 왜 혼나는지 태반은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고, 60년 더 살면서 차차 알아가면 된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치인 것 같습니다.
50년의 시간, 100년의 시간을 지켜온 곳에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조급함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시간이라는 재화는 우리가 애써 구하지 않아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 시간들을 진정성 있게 누릴 준비가 되었다면, 상업시설에서도 테넌트와 커뮤니티가 오래도록 함께 가는 무언의 지지와 옳은 방향성이 있다면, 지난 50년 못지않게 앞으로의 50년도 무리 없이 지켜갈 것이라 보입니다.
[시리즈 소개]
도시, 사람, 자본의 움직임을 탐색할 수 있는 시티& 트렌드에서 도쿄 상업시설을 다시 소개합니다. 도쿄에는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 상업시설들이 꽤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그 중에서 일부는 케이스 스터디로 여러번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명품의 가치를 제품 하나만 본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듯, 잘 기획되고 개발된 상업시설은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볼 내용들이 많습니다. 특히 완벽한 컨셉에 따라 운영되는 현재 모습에서 공간의 성공을 유지하는 핵심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서울에 상업시설이 생긴다면, 어떤 공간들이 있으면 좋을까?”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상업시설 컨설턴트의 전문적인 시선으로 도쿄의 상업시설을 다시 보았습니다. 새로운 상업시설의 컨셉 기획과 구현, 운영에 인사이트가 될 내용을 알아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