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골리앗과 작은 다윗의 싸움 ©ChatGPT 생성 이미지
골리앗처럼 쓰러진 거대 상권의 몰락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단순히 ‘약자가 강자를 이겼다.’는 감동적인 사건으로 그칠 수 있지만 상업시설을 기획하고 도시와 소비 패턴을 분석하는 측면에서는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과거에는 골리앗 같은 상업시설인 백화점 등의 대형 쇼핑몰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했고, 소비의 최전선이었습니다. 따라서 도시는 중심상업지역을 기점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주위로 주거지역이 발달하면서 퍼져 나가는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20세기 초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버제스(E.W Burgess)는 시카고에서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을 바탕으로 동심원 이론(Concentric Zone Theory)을 주장합니다. 임대료는 접근성에 의해서 결정이 되므로, 도시의 중심지일수록 임대료가 비싸고, 외곽일수록 교통비의 증가로 인해 임대료가 저렴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동심원이론이 설명하는 도시의 형성 과정과 도시의 구조 ©Google
한국 역시 도시의 중심이 과밀화될수록 지가는 오르고 도시는 확장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상업시설들은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죠.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세계, 롯데 백화점 본점은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지만 새로운 매장은 더 이상 도시의 중심부에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울 외곽에 아웃렛이나 스타필드와 같은 대형 쇼핑몰로 생겨나고 있죠.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백화점 뒤의 건물을 보면 과밀화되어 있는 중심상업지역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
도시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접근성이 떨어졌기에 상업시설은 소비자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점차 커졌습니다. 허프 모형(Huff Model, 1963)이 이론적으로 그 흐름을 뒷받침합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상업시설의 규모가 크고, 소비자와의 거리라 가까울수록 해당 시설을 선택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도시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상업 시설일수록 소비자들에게 더 크고 더 많은 브랜드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물론 단순히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차별성을 갖기 위해 상품의 일부 카테고리에 집중한 초대형 전문 매장도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경쟁이 지속될수록 이렇게 몸집을 불려 온 대형 상업시설은 점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비자와 상업시설과의 거리가 먼 미국에서 실패 사례들이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1,5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던 세계 최대 장난감 소매업체인 토이저러스(ToysRus)는 2018년 미국 내 모든 매장을 폐쇄했으며, 전자제품 전문으로 미국에만 6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던 서킷시티(Circuit City)도 2009년에 모든 매장을 폐쇄하고 청산 절차를 밟았죠.
오프라인 매장이 사라진 미국 토이저러스(ToysRus)와 서킷시티(Circuit City) 매장의 모습 ©Bloomberg, Richmond BizSense
대형 상업시설의 몰락은 전문적인 상품을 취급하는 매장에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1979년 개장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복합 쇼핑몰이었던 센추리 쓰리 몰(Century III Mall)은 경영 악화로 2019년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1975년에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개장한 대형 쇼핑몰인 롤링 에이커스 몰(Rolling Acres Mall) 역시 2013년에 문을 닫게 되었죠. 특히 롤링 에이커스 몰은 150개 이상의 매장과 영화관이 운영되던 초대형 복합 쇼핑몰이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임차인이 급격히 감소하였고 결국 2017년 말 이 쇼핑몰은 철거되었죠. 이후 복합 쇼핑몰이 철거된 부지를 Amazon에서 매입해 2020년 대규모 물류센터를 열었습니다. 대형 상업시설이 소비자들의 니즈와 유통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규모의 상업시설이었던 센추리 쓰리 몰(Century III Mall)과 롤링 에이커스 몰(Rolling Acres Mall)의 폐장 후 모습 ©TRIB LIVE, Love Exploring
철거된 롤링 에이커스 몰(Rolling Acres Mall) 부지에 세워진 아마존 풀필먼트 센터(Amazon Fulfillment center) ©Akron beacon journal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전략
다윗의 성공 방식은 명확합니다. 그는 적의 약점을 정확히 관찰했고, 그 약점을 겨냥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갑옷과 칼을 선택하는 대신 자신이 평소 가장 익숙하게 사용해 온 도구인 새총으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인의 약점인 이마를 정확히 맞추는 데 성공하죠. 단순한 행운이 아닌, 철저한 전략의 결과였습니다. 이는 마케팅의 핵심이자 상권 기획에 반드시 필요한 STP 전략과 닮아있습니다.
먼저 그는 시장 세분화(Segmentation)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하는 방식인 근접전이 아니라 자신만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원거리 전투를 선택합니다. 전쟁터라는 시장에서 자신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을 염두에 두고 전투에 참여한 것이죠. 다음으로 그는 목표 설정(Targeting)을 통해 골리앗의 무장된 몸 전체가 아니라 유일한 약점인 ‘이마’만을 겨냥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만의 포지셔닝(Positioning)을 통해 힘과 크기로 경쟁하는 군인이 아닌 가볍고 민첩한 양치기 소년으로 차별화하여 전장에서 자신이 존재 이유를 재정의합니다.
최근 수십 년간 상업시설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더 많은 브랜드를 입점시켰고, 쇼핑뿐만 아니라 문화와 외식을 모두 포함한 복합몰로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소비자들이 차별성 없는 거대한 규모에 조금씩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구조, 어디를 가도 중복되는 브랜드, 거대화될수록 불편해지는 소비 동선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되었고, 크기만 키운 상업시설은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더 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상업시설이 단순한 쇼핑의 기능뿐만 아니라 차별화된 존재의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상업시설은 물리적인 화려한 건축 설계보다 타깃 소비자에 맞춘 콘텐츠 설계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해당 시설과 공간이 가진 스토리와 정체성을 활용한 브랜드 구상이 콘텐츠에 결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별, 연령별, 시간대별, 거주지별 등 다양하게 세분화된 고객의 소비패턴을 고려하여 공간별로 차별화된 운영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소비자들의 기억에 남는 공간으로서 서비스 만족을 작은 부분에서부터 촘촘하게 이끌어 내야 합니다.1
‘장소성’이 이끄는 밀도 있는 상권의 미래
소비자들은 ‘더 크고 더 많은 것’이 아닌 ‘더 좋거나, 남들과 다른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의 이러한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상권의 기획 단계부터 점점 더 특정한 소비자를 향한 정확한 목표가 중요해질 것입니다. 규모가 아닌 차별성을 특징으로 하는 상권의 모습은 세계 주요 도시의 여러 곳에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일본 도쿄의 다이칸야마 지역은 대형 쇼핑몰이 없음에도 항상 사람들로 붐빕니다. 이 지역에는 감성적인 편집숍이나 카페, 츠타야 서점, 티사이트 등의 공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덕분에 단순한 쇼핑을 넘어 공간 자체가 소비자들의 목적지가 되고 있죠. 지역이 가진 정체성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변모하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그 공간을 이해하고 경험을 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모습을 보입니다.
도쿄 다이칸야마 거리와 츠타야 서점의 모습, 비 오는 평일 오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간을 즐기는 모습을 보인다. ©조훈희
뉴욕의 소호(Soho) 지역 역시 차별성을 기반으로 소비자들의 행동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전 세계에 표준화된 상품을 공급하고자 하는 글로벌 브랜드조차 기존의 틀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일반 매장이 아닌 실험적인 매장을 열고, 이 지역 특유의 분위기가 어우러진 브랜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죠. 단순히 소비자들에게 해당 브랜드를 구매할 수 있는 상업 공간을 제공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지역 상권이 가진 특성에 맞춰서 브랜드가 함께 호흡하고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략적인 선택입니다.
서울의 성수동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수많은 팝업스토어가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춰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상품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을 팝업스토어의 형태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지역에서 팝업스토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극도로 세분화된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춰서 촘촘하게 기획되어야 하며, 짧은 시간 동안 소비자들에게 강한 각인을 남겨주고 사라져야 합니다.
공간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규모가 아니라 해당 공간이 가진 특별함에 대한 인식의 기반이 필요합니다. ‘장소성’이라고 정의되는 이러한 성격은 위치의 개념을 넘어서 공간과 지역이 가지는 의미와 정체성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장소성이 소비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국내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지하는 장소성은 직접적인 행동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해당 지역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과 활동을 통해 장소에 대해 애착을 가지게 될수록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또한 집단적인 판단보다 개인의 감정이 행동을 유도하는데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죠.2 즉, 상업시설은 상징적인 규모보다 세분화된 소비자들의 경험과 활동을 유발시켜야만 소비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상권에 대한 성공 방정식을 바꿔야 할 때
거대한 시설과 큰 공간이 성공한다는 방정식은 깨졌습니다. 오히려 크기 때문에 정체성을 잃고, 소비자에게 식상함을 줄 수 있으며, 유지비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작은 규모의 상권이나 공간이라도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콘텐츠가 깊고, 감성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크기를 키우는 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밀도를 높이는 전략을 통해 ‘작지만 강한’ 상업시설과 공간을 기획해야 합니다. 그 시작은 거창한 시설과 상품의 나열이 아니라, 정교한 큐레이션과 서로 다른 이야기의 설계일 수 있습니다. 공간의 가치와 지속성은 그 안에 담긴 콘텐츠가 만들어내는 깊이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상업시설이 장소성을 기반으로 어떤 방향의 설계가 이루어져야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할지 조금 더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 화에서 살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