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는 5월 둘째 주 일요일이면 어머니의 날을 기념합니다. 어린이날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5월 5일이지만 5월 8일 어버이날은 없습니다. 대신 유럽이나 미국처럼 5월 둘째 주 일요일에 어머니의 날을, 6월 셋째 주 일요일에 아버지의 날을 축하합니다. 계절성을 중시하는 도쿄답게 매해 5월이면 어머니의 날을 테마로 꽃전시가 다양하게 진행됩니다. 꼭 5월이 아니더라도 1년 내내 절기나 기념일, 감사, 위로 등 다양한 이유로 꽃이 소비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케바나’라는 꽃꽂이 관습이 생활에 깊이 배어 있어 꽃은 동네 마트에서 판매되는 신선한 생필품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날을 기념해 공간을 꾸민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 내부 모습 ⓒ노윤영
도쿄에 거주하며 생긴 일상의 변화 중 하나는 꽃을 사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쉴 틈 없이 바쁘게 지내던 워킹맘 시절에는 한주도 견디지 못하고 시들어버릴 꽃에 시선을 둘 여유가 없었습니다. 지인의 승진이나, 장례식 등 꼭 필요한 상황이 되어야만 구매 의지가 생기는 아이템에 가까웠습니다. 반면 도쿄에서는 4~5년간 일상의 수많은 꽃들에 점차 학습되며 저절로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꽃을 구입하는 습관이 만들어졌습니다. 서울에서도 2030 세대 위주로 꽃에 대한 구독서비스가 활성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요. 곧 동네마다 타겟을 달리한 플라워 숍들이 빠른 속도로 생겨나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다양한 색상과 종류의 꽃을 구매할 수 있는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 홈페이지
도쿄의 쇼핑몰들은 플라워 숍을 필수 테넌트로 구성합니다. 동네에 따라 객단가 등을 고려하여 적합한 브랜드를 입점시킵니다. 그래서 도쿄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플라워 숍이 있는데요. 브랜드화 된 플라워 숍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패션매장의 플라워 숍, 유니클로의 공간실험
유니클로는 의류 브랜드지만, 실용성을 중시한 일상복 중심의 제품 구성으로 거의 생필품에 가까운 옷들을 판매합니다. 일본에서 출발한 브랜드인 만큼, 유니클로의 브랜드력은 여느 해외보다 일본에서 훨씬 뚜렷한 위상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가진 유니클로가 2020년부터 매장에서 꽃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의류 매장에서 신선함을 유지해야 하는 카테고리의 상품인 생화를 추가한다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는 단지 판매 상품군을 확장하려는 것보다 쇼핑공간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재정의하고자 하는 전략에서 비롯된 결정입니다.
브랜드 매장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재정의하고자 꽃 판매를 시작한 유니클로 ⓒ유니클로 홈페이지
유니클로가 아무리 생필품에 가까운 의류라 하더라도 의류 구매의 빈도는 신선식품에 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신선식품을 들여놓기엔 브랜드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기에, 구매 빈도가 높고 신선한 제품인 꽃을 매장 전면에 두어 이미지 변화를 꾀한 것입니다. 더욱이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소비자들에게 매장을 방문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줄 아이템으로도 꽃이 적절했습니다. 외부에서는 먹는 것을 꺼리던 시기이므로 카페나 음식 판매보다 꽃이라는 감성적 매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만큼 도쿄에서 꽃 소비의 빈도가 높은 것도 한몫했습니다.
빈도 높은 소비 아이템인 꽃을 매장 활성화 전략 상품으로 활용 ⓒ유니클로 홈페이지
유니클로는 하라주쿠 매장에서 꽃 판매를 시작한 후 긴자, 신주쿠 등 도쿄 주요 매장으로 확산해 나갔습니다. 한 다발에 39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주 2~3회 입고되며, 신선함을 유지하면서 매장의 계절감을 살려주는 역할도 합니다. 최근에는 온라인 숍에서도 꽃 배송서비스를 시작하였습니다.
정사각형 플라워박스로 오브제가 되는 '니콜라이 버그만(Nicolai Bergmann)'
도쿄를 대표하는 플라워 숍을 물으면 니콜라이 버그만이 첫손에 꼽힙니다. 1976년생 덴마크 출신 플로리스트 니콜라이 버그만은 2001년 롯폰기 힐즈에 있는 편집숍 에스트네이션 안에 작은 플라워 부티크 매장을 열고, 브랜드를 시작합니다. 이 브랜드만의 특색이자 아이덴티티는 정사각형의 플라워박스입니다. 브랜드 이름을 듣는 순간 소비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이기도 하죠. 다른 브랜드에도 플라워박스는 있지만, 니콜라이 버그만의 감각을 따라올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공간적 제약이 많은 꽃다발을 대신할 대안으로 구상한 디자인이지만, 브랜드의 독보적인 아이덴티티가 된 셈입니다.
니콜라이 버그만의 플라워박스는 다양한 디자인과 꽃 스타일로 유명하다. ⓒ니콜라이 버그만 홈페이지
여러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특별한 플라워박스를 구성하기도 한다. ⓒ니콜라이 버그만 홈페이지
니콜라이 버그만은 롯폰기 힐즈 내 편집숍 매장 다음으로, 아오야마에 'Nicolai Bergmann Flowers & Design'이라는 이름으로 플래그십 매장을 열고 본격적으로 브랜드를 키워 나갑니다. 이 공간에서는 플라워 숍과 함께 'NOMU'라는 덴마크 스타일의 식사와 커피를 제공하는 카페도 함께 운영합니다. 플래그십 매장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쇼핑몰에 입점해 있는 형태로 운영되는데 롯폰기 힐즈, 신주쿠 이세탄부터 최근에 문을 연 아자부다이힐즈, 타카나와 뉴오만몰 등 여러 공간에서 브랜드 매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도쿄에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교외 지역에서는 대형 정원이자 브랜딩 공간인 '히네코 가든'을 운영합니다. 입장료가 있지만 8,000평 규모의 정원에 산책로, 파빌리온, NOMU 매장 등 다양하게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구성되어 있으며, 플라워 워크숍이나 브랜드 행사 등에 활용되기도 합니다.
지역과 공간 특징에 따라 각기 다른 컨셉의 매장을 운영한다. 사진 속 매장은 롯폰기. ⓒ니콜라이 버그만 홈페이지
플라워 숍과 카페가 한 공간에서 운영 중인 아오야마의 NOMU 매장 ⓒ니콜라이 버그만 홈페이지
니콜라이 버그만의 브랜드 포지셔닝은 단순한 플라워 브랜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전체 테넌트 믹스의 감도를 높이는 리테일 콘텐츠 역할을 합니다. 또한 도쿄라는 도시의 플라워 리테일 컨셉의 대표 레퍼런스로 활용됩니다.
'Living With Flowers Every Day'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
아오야마 지역에는 이곳의 터줏대감 격인 플라워 숍 브랜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이 그 주인공입니다. 'Living With Flowers Every Day'를 모토로 1989년 오픈한 이후 100여 개 이상의 점포를 운영하는 브랜드입니다. 워낙 매장 수가 많아서 '꽃이 좀 괜찮아 보이네' 싶으면 대부분 이 브랜드 간판이 눈에 들어올 정도이죠.
꽃과 티하우스가 함께 운영되고 있는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 매장 전경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 홈페이지
아오야마 본점은 도큐가 소유한 소규모 저층형 몰 그라세리아에 입점해 있습니다. 플라워 숍과 나란히 티하우스도 운영하고 있는데요. 주말이면 길게 줄을 설 정도로 붐비는 명소입니다. 티하우스는 온실 컨셉으로, 공간을 식물과 꽃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의 실내 정원 깊은 곳에 앉는 느낌이 들죠. 저절로 깊은 심호흡을 하게 될 정도로 편안함이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꽃과 식물로 가득 채운 티하우스 실내 공간은 실내 정원에 들어온 느낌을 제공한다.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 홈페이지
꽃을 매개로 리테일 비즈니스 클러스터를 만들어 가는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 홈페이지
더불어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은 하나키치 플라워 스쿨도 함께 운영 중입니다. 초보자를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며, 단계별로 꽃을 테마로 한 커뮤니티까지 만들어 꽃을 매개로 한 리테일 클러스터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꽃과 소품으로 공간 디렉팅을 제시, ‘All Good Flowers’ by SOLSO
아오야마 중심 상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매장이 위치한 ‘올 굿 플라워즈’는 조경디자인 회사 솔소에서 운영하는 플라워 숍입니다. 화려한 색감을 과감하게 사용한 매장만으로도 “삶의 무게는 잠시 내려두고, 가볍고 캐주얼하게 꽃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라”는 브랜드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꽃을 피자 박스 또는 나이키 신발 박스에 담아두고, ‘뭘 그리 기운이 없어.’라고 말하며 어깨를 치는 느낌이 드는 브랜드입니다. 꽃과 함께 둔 소품은 종류가 많지 않아도 하나하나 탐나는 디자인 제품들이 가득해 이런 종류의 아이템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색감과 디자인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분 전환이 가능한 올 굿 플라워즈 매장 모습 ⓒ올 굿 플라워즈 홈페이지
직접 셀렉한 계절의 꽃을 피자 박스에 넣어 판매하거나 다양한 디자인 소품까지 판매하고 있다. ⓒ노윤영, 올 굿 플라워즈 홈페이지
야오야마 외에 후타고타마가와의 라이즈 쇼핑몰에 입점해 있고, 다이칸야마의 새로운 테노하, 도큐플라자 하라카도, 토라노몬힐즈 등 최근 신규 시설된 공간에도 매장을 입점시켰습니다. 모두 도쿄 내에서 감도가 높고 선별된 리테일을 입점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만큼 올 굿 플라워즈가 선별된 브랜드이자 테넌트인 셈입니다.
꽃을 매개로 여러 디자인의 상품과 서비스를 기획 개발해 브랜드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올 굿 플라워즈 홈페이지
도쿄에서는 꽃이라는 단순한 단일 카테고리가 객단가와 지향점에 따라 다채롭게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중심 상권의 쇼핑센터부터 동네 리테일까지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브랜드 포지션을 잡아가는 브랜드도 다양합니다. 단순히 꽃집을 넘어 쇼핑몰을 기획하는 이들, 콘텐츠와 공간을 소비하는 이들 모두에게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리테일 콘텐츠로의 기능을 해내고 있습니다. 작은 아이템이지만 테넌트 믹스의 필수 아이템이 된 도쿄의 플라워 숍의 또다른 변주가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