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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쁜 사람들! 자기들만 맛있는 보쌈먹고..."

2025.05.27 07: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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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런 말이 있었다다른 동네엔 있는데 여의도에 없는 세 가지가 뭘까답은 전봇대육교, 단독주택이었는데, 더 옛날 기준으로는 연탄 가게를 꼽는 사람도 있었고 바야흐로 1995년에 5호선이 개통되기 전에는 지하철역도 없어서 대방역까지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했다하지만 철저한 식생활 지상주의자로서 여의도 3無에 대한 필자의 답은 꽤 오랫동안 괜찮은 이탈리안 레스토랑김밥과 떡볶이가 함께 준수한 분식집그리고 보쌈집이었다.

회사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여의도엔 맛있는 보쌈집이 없을까한때 유행이던 놀부보쌈도 어느새 사라지고 꽤 오래 명맥을 이어오던 매생이 칼국숫집에서 팔던 보쌈도 어느 날 자취를 감췄다찬 바람 불면 탱글탱글한 굴보쌈 한번 먹고 싶어도 마땅한 보쌈집이 없어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를 떠나듯 고생스럽게 강을 건너야 했는데 이는 실로 무지의 소치였던 것이다사람이 아무리 한 치 앞을 몰라도 그렇지 동여의도 생활권에서 여의도 공원만 건너면 무려 1985년부터 존재해 왔던 멋진 맛집이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북창동 「신성」이며 가산디지털단지 「춘천옥」을 찾아다녔다니처음 방문하게 된 「정우칼국수보쌈」에 점심 대기 줄을 서서 SINCE 1985라고 쓰인 유리창 안쪽으로 손님들이 바글바글 꽉 들어찬 광경을 봤을 때 순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진한 배신감을 느꼈다아니 나쁜 사람들그동안 자기들만 맛있는 거 먹고!!

알다시피 삼겹살을 지글지글 노릇하게 구워 먹으면 맛이 없기가 더 힘들다그래서 냉삼이든 생삼겹이든 양념이든 삼겹살 맛집을 찾으려면 그다지 품을 들일 필요가 없다잘 익은 김치를 구워준다거나 곁들인 찬이 좋다거나 쾌적하고 환기가 잘 된다거나 취향껏 고르면 될 일이다하지만 물에 빠뜨린 고기가 상대적 저칼로리라는 하찮은 장점 외에도 맛까지 있으려면 아무래도 뭔가 고수의 숨결이 필요하다닭고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바삭하게 튀겨내는 치킨 프랜차이즈는 표준화된 레시피로 양산되어 온갖 이름으로 골목마다 있지만 백숙 잘하는 집은 훨씬 드물지 않은가. 

이 집에서 내어오는 보쌈은 마치 한방보쌈처럼 살짝 진한 색감으로 삶아져 등판하는데 일체 잡내 없이 고기가 야들야들 부드러우면서도 족발처럼 쫀쫀한 그 맛이 참으로 일품이다. 퍽퍽하지 않고 보들한 살코기와 흐물탱 미끄덩하지 않고 쫀득한 비계의 밸런스가 가히 완벽에 가깝달까적어도 이 집에서는 살코기만 남기고 비계를 고스란히 발라내는 상대방 앞에서 왠지 야만인이 된 거 같아 착잡해질 일이 없다게다가 오독오독한 무말랭이 스타일로 굵게 썰어낸 무김치와 붉은빛 때깔 좋고 맛도 좋은 배추김치의 조합까지 나무랄 데 없어서 필자 기준으로는 2인 방문 시 어느 성별과 같이 가건, 대()자 주문이 기본이다사실 대()자와 중()자가 6천 원 차이라면 무릇 스마트한 소비자로서 메뉴의 행간을 읽고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방보쌈처럼 진한 색의 야들한 식감이 일품인 정우보쌈. ⓒ여의도 먹장금

메뉴 자체가 단출해서 주문 시에 고민의 여지가 없어 오히려 좋다저녁 시간에만 맛볼 수 있는 파전도 꽤 맛있고 간이 세지 않은 열무김치와 함께 먹는 사골육수로 말아낸 칼국수도 깔끔하다아니 키보드에 침 흘리면 곤란한데.

사골육수로 말아낸 칼국수. 깔끔한 맛이다.  ⓒ여의도 먹장금

그런데 혹시 다들 아시는지굽지 않고 삶아 낸 건 같은데 왜 보쌈은 칼국수랑 짝을 이루고 수육은 막국수랑 짝을 지어 팔까둘은 무슨 차이길래수육을 쌈채나 김치에 싸서 먹으면 보쌈인가아무래도 놀부랑 원할머니가 해주시는 게 보쌈이고 김장 날 엄마가 길게 찢은 생김치를 올려주시는 건 수육이라 부르는데일하다가 점심이나 야식으로 먹는 건 보쌈이고 골프장 근처에서 먹는 건 수육인 건가금쪽같은 퇴직연금으로 운용하는 ETF나 펀드 종목도 이렇게 골똘히 분석한 적이 없건만 참으로 궁금하다시원하게 답을 아시는 분은 꼭 좀 알려 주시길.

[시리즈 소개]
어떤 지역을 갔을 때, '이 동네 맛고수, 놀이고수를 만나고 싶다. 그들이 노는 곳, 단골인 가게를 알고싶다'라는 마음이 들었던 적 있으시죠? 낯선 지역에서 괜찮은 공간을 찾을 때 신뢰도 높은 방법 중 하나가 고수의 추천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죠. 또한 그들의 추천과 콘텐츠는 동네의 매력을 느끼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티&'이 일상의 즐거움을 1g 더해줄 숨은 고수, 로컬 크리에이터의 공간 소개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시작은 직장인으로, 동네 주민으로 수십년간 여의도 안에서 맛을 탐험한 맛고수의 '맛기행' 장소입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살아있는 동네 찐 고수를 발굴해 여러 지역의 매력적이고 개성 강한 공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여의도 먹장금

여의도 먹장금

"세상에 맛있는 것이 그리 많다는데 늦기 전에 제가 한 번 기미해보겠습니다."

수십 년 간 여의도 증권가에 적을 두고 삼시세끼를 꾸준히 실천해 왔으며, 재건축은 참아도 공복은 못 참는 여의도 구축 아파트 주민으로서 늙지 않는 식탐과 안전 노화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