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마왕 신해철의 노래를 들으며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릇 도시인의 삶이란 ‘아침엔 우유 한 잔, 점심엔 Fast Food. 쫓기는 사람처럼 시계바늘 보면서 this is the city life’라 했거늘. 숨 가쁘게 돌아가는 여의도 증권가에서 일한다는 건 영화 속 뉴욕 ‘월 스트릿 맨’ 같은 그런 짙은 슈트 자락을 휘날리며 회색 빌딩 숲 한복판에서 한쪽 어깨와 귓바퀴 사이에 휴대폰을 끼우고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그런 그림이었어야 했는데. 현실의 도시인이자 직장인은 샤넬 오픈런도 롤렉스 오픈런도 아닌,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의 점심을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줄을 서고, 새로 생긴 수제 햄버거를 위해 전날부터 파티원을 모집하고 선발대를 보내 번호표까지 뽑아가며 최적의 런치 플랜을 실행한다.
이렇게나 중요한 직장인 일과의 꽃, 지친 하루의 오아시스인 점심을 대비함에 있어 높은 확률로 다수의 찬성을 확보할 수 있는 무난한 인기 메뉴는 단연 제육볶음이다. 가격도 상대적으로 적당해 한우집처럼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지 않고 맵단짠의 밸런스가 평균치 이상이면 웬만해선 맛없기가 더 어렵다. 요즘엔 둘 이상의 사람이 모이면 반드시 누군가는 저탄고지 웰빙 식단을 하고 있어 탄수화물만으로는 다소 죄스럽고 또 누군가는 왠지 매콤하고 얼큰한 게 땡기는 날이기 마련이므로 쌈채나 찌개, 입맛 도는 밑반찬이 곁들여지는 제육볶음은 채식파도 육식파도 매콤파도 원만한 합의를 볼 수 있다. 게다가 베리에이션도 다양하다. 조리법상으로야 세세한 다름은 있겠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제육볶음을 필두로 고추장삼겹살, 오삼 내지는 쭈삼 불고기, 김치두루치기 등등 여러 가지 이름의 변주가 가능하고, 마치 우렁된장쌈밥이 먹고 싶어서 갔을 뿐인데 우연히 제육볶음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위장할 수도 있다.
오늘 아침밥은 마치 현역 피겨 선수 느낌으로 저지방 그릭요거트에 과일, 견과류 곁들임이라는 무리수를 둔 탓에 점심엔 무조건 고자극 한식이 필요했고, 고민 없이 제육볶음을 먹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꼽는 여의도 제육볶음의 정석 실력편은 바로 「남도집」이다. 하얀색 바탕의 동글뱅이 간판에 장기말 같은 글씨체로 평범하게 ‘남도집 한식’이라 씌어있다. 이름만 보면 화려하고 값비싼 남도산 해산물 요리나 민어회, 홍어삼합 등이 그득할 것 같지만 메뉴판도 간판만큼이나 단출하다. 제육볶음, 애호박찌개, 청국장, 보쌈으로 끝이다. 심지어 보쌈은 하루 전 예약이 필수라서 고를 수 있는 메뉴가 결국 세 가지뿐인데 사실 청국장찌개도 간이 딱 맞고 콩 건더기도 수북하니 맛깔난 편이라 내로라 하는 청국장 전문집에 꿀리지 않음에도 이 집의 시그니처인 애호박 찌개에 밀려 적어도 세 명 이상 가지 않으면 선발 라인업에 들지 못하는 설움을 받는다.
단출한 간판의 한식당 '남도집' ⒸSPI 플랫폼 마케팅팀

요즘 보기 드문 진하고 구수한 청국장찌개 ⒸSPI 플랫폼 마케팅팀
제육과 찌개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4가지 밑반찬이 차려지는데 간간하고 맵싸한 제육볶음과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인지 반찬들이 하나같이 슴슴 정갈해서 아직 주인공 요리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자꾸 밥이 줄어든다. 이날은 쪄낸 가지, 방풍나물, 김치, 김장아찌가 나왔는데, 같이 간 일행은 이 김장아찌에 흠뻑 빠져서 몇 번이나 더 청해 먹었다. 남도 지방에서 많이 먹는다는 이 집의 대표 선수 애호박 찌개는 숭덩숭덩 썰린 애호박과 돼지고기가 뻑뻑할 만큼 뚝배기에 가득 담겨 나오는데 언제 먹어도 얼큰 달큰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4가지 밑반찬. 때마다 반찬 구성이 달라진다. Ⓒ여의도 먹장금

숭덩숭덩 썰린 애호박과 돼지고기가 뚝배기에 가득 담겨 나오는 애호박 찌개 Ⓒ여의도 먹장금
그리고 마침내 제육볶음의 등장! 붉은 벨벳처럼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비주얼과 알싸한 불향에 군침이 샥 돌면서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맛있다. 게다가 음식을 잘해서인지 그만큼 좋은 고기를 쓰는 건지 두툼한데도 양념이 잘 배인 돼지고기의 식감이 쫀득쫄깃해서 어깨춤이 절로 난다. 그래 인생 뭐 있나. 맛있는 제육볶음 몇 점에 잠시라도 잊힐 수 있을 만큼의 복잡함만 이고 살고 있는 거면 대충 살 만 한 거지.

고기가 두툼해서 씹는 맛이 있는 제육볶음 ⒸSPI 플랫폼 마케팅팀
「남도집」은 이거 하나만을 위해 먼 데 사는 친구를 부를 만큼 거창한 맛집은 아니지만, 배달 음식과 프랜차이즈 식당들의 표준화된 맛에 물릴 때쯤 생각나는 소박한 풍미의 집밥스러움이 있어 꽤 괜찮은 밥집이다. 신해철이 되뇌던 함께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 「도시인」들도 편하게 한 끼 채워갈 수 있는. 물론 집밥 같다는 표현은 좀 양심이 저리긴 한다. 집밥은 집밥인데 그게 우리 집은 절대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