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과에 입학해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은 필름이었습니다. 필름 카메라로 촬영 하고 어떤 이유로 해당 사진을 찍었는지 설명하는 수업이 이어졌습니다. 프레임 안에 빛을 담고, 찰나의 순간을 기록하며, 보는 이들의 시선을 유도합니다. 이에 더해 사진은 사건의 시간 흐름을 멈춰 세운 예술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떤 구도인지, 어떤 장면인지 오래 바라보게 됩니다.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오해도 따라다니고,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리기도 했습니다. 사진에 특화된 공립 미술관이 이제야 서울에 처음 생겼다는 소식이 유독 반가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 개관한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윤준환.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제공
사진술 도입 140년, 첫 사진 전문 공공 미술관의 탄생
사진 전시는 여러 공간에서 진행되곤 합니다. 그런데 사진이라는 예술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한국에 사진술이 도입된 지 140여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뮤지엄한미'나 '고은미술관' 등 사립으로 운영되는 사진 전문 미술관이 있긴 하지만, 공공 미술관은 부재했습니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2015년부터 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서울 동북권 지역에 미술관 건립을 위한 도시 문화 정책 사업을 추진하며 사진미술관을 계획합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죠.
설계의 출발은 '사진을 위한 건축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2019년 공모에 당선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믈라덴 야드리치와 일구구공도시건축 건축사사무소가 협업하며 설계를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카메라 셔터가 열리고 닫히는 원리에서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사진의 최소 단위인 '픽셀'을 모티프로 삼은 네모 모양의 반듯한 조형으로 빛과 시간을 형상화해 공간을 변주했습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사진을 걸기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진 예술과 관련된 철학부터 사회적 역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독립된 시각 예술 장르로 시민들과 마주하는 첫 공공 미술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높은 층고가 돋보이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1층 로비 ⓒ박지수
사진은 빛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빛은 사진을 손상시킬 수 있는 변수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계성을 적절하게 반영해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빛을 받아들이면서도 통제하고 조율하는 공간을 구현했습니다. 외관은 콘크리트로 무채색 미감을 유지했고, 빛과 시간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습이 보이도록 했습니다. 내부는 자연광을 차단한 전시공간과 채광이 좋은 휴식공간으로 확실하게 나눴습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의 입구 모습 ⓒ박지수
‘사진’을 목적으로 한 문화시설의 역할
사진이라는 예술은 가장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예술에 가깝습니다. 모바일 기기와 SNS의 영향으로 누구나 생산과 소비를 하는 아이템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가까운 예술인 셈이죠. 동시에 기억, 시간, 장소 등을 담는 매체의 기능도 있습니다. 여기에 서울 문화 인프라에서 아직 비어 있던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서울에 생긴 첫 사진 전문 미술관이라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죠. 사진은 공간의 ‘목적’이 되기에 적합한 문화 아이템이었던 것입니다.
문화를 만든다는 것은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경험, 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공공간 또는 문화 예술 공간을 짓는 것만큼 어떻게 운영하고,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것인지도 중요합니다. 변화하는 프로그램, 달라지는 이벤트가 있어야 계속 오고 싶은 곳으로 인지하기 때문이죠. 문화 콘텐츠는 해당 지역의 고유한 특성과 차별성을 부각해 방문객, 거주자에게 매력적인 장소로 인식되는 계기를 만들곤 합니다. 사람들에게 특별한 경험과 감각을 공유하게 하는 매개가 되는 것이죠. 서울시는 사진이라는 일상 예술을 통해 서울에서도 동북권 지역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문화 제공을 계획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실제 해외 도시들의 경우 사진을 매개로 도시 마케팅을 전개했습니다. 기존 유휴공간을 활용해 사진 미술관으로 운영 중인 FOAM(FOAM, Fotografiemuseum Amsterdam)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16년에 약 24만 명, 2019년에는 약 19만 명이 방문했습니다. 운영을 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매년 찾는 대표 사진 미술관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또한 FOAM은 젊은 신진 작가 촉진에 집중하며 35세 이하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이는 젊은 층과 소통하는 운영 전략인 동시에 외부 발산에 익숙한 대상과 접점을 만들어 가는 하나의 방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도심 유휴 공간에 사진 미술관을 지어 사람을 모으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며 지역 활성화 효과까지 높여가고 있는 것이죠.
문화적 체험 소외 지역의 변화를 불러오는 공공공간
서울 전체 문화 예산의 70% 이상이 도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는 문화 향유 기회의 비대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지역에 따라 교육, 의료, 교통, 문화의 접근성이 달라지는 것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을 고려해 서울시는 창동과 상계 지역을 '2030서울플랜'의 동북권 중심지로 삼고, 문화산업단지 조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울 동북권(도봉, 노원, 강북)은 과거 주거 중심의 베드타운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인구는 많지만 문화 인프라는 부족합니다. 문화, 소비, 일자리 등의 자급자족력이 약하죠. 이런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균형 발전을 위해 창동 상계에 '신 경제문화 중심지'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죠.
특히 창동은 지역 이름에 '창고가 많은 동네'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정도로 서울 내 대규모 유휴 부지가 존재합니다. 기존 상권과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문화 지구 조성이 가능한 입지 조건을 갖춘 것이죠. 이에 대규모 문화공간이 서울시립 사진미술관도 창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 자치구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에 문화 수요가 높다는 점도 기회요인입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키워드는 부재하지만 소비는 준비된 지역이기에 문화 시설을 지역과 연결하고 활성화하기에는 긍정적 환경이죠.
공공공간, 문화공간의 건립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문화 구조를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자 흐름의 하나입니다. 도시 재생과 같은 정책적 기조도 있었겠지만 서울의 가장자리, 오랜 시간 산업 물류와 철도 시설의 집합지로 기억되던 창동에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들어선 것은 이 같은 도시 문화 구조를 재편하고자 하는 실험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폐쇄된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 해 런던 템스 강변의 동선을 변화시킨 '테이트 모던'의 개관은 주변 지역을 문화 관광의 핵심지로 바꾸는 출발점이 되었죠. 지역에 들어선 미술관 하나가 지역 전체의 변화를 불러온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의 역할도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 미술관 '테이트 모던' 건물과 화력발전소 흔적으로 남아있는 굴뚝. 런던을 대표하는 문화 광광지이자 아트 허브로 불리며 연간 4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고 있다. ⒸSPI 플랫폼 마케팅팀
건물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 경제, 정책 등의 움직임을 통해 지역이 달라지고, 이는 도시의 문화 구조 변화로 이어집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도 이런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창동이라는 낯선 지역이 '사진을 보러 가야 하는 곳'으로 기억되기 시작하면 지역은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도시의 문화 재편도 가능해지겠죠. 실제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 첫날 오후 4시부터 일반 관람객의 입장이 시작되었는데, 많은 이들이 사진예술의 매력, 서울시립 사진미술관만의 감각을 경험하고자 긴 줄을 섰습니다. 미술 애호가로 알려진 방탄소년단 RM도 이곳을 찾으며 ‘예술 핫플’이라는 이미지 형성에 일조했습니다. 각종 SNS를 통해 공간이 소개되었으며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죠. 자연스럽게 창동이라는 지역에 대한 관심 증대로 연결됩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을 계기로 지역을 탐방하고, 알아가는 기회가 열리는 셈입니다. 방문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지역은 활성화되고 또 다른 기회들이 생기며 선순환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지죠.
사진 문화 생태계의 새로운 허브로 탄생하다
운영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가진 공공성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과의 접점을 만들기 위한 활동에 주력합니다. 전시와 더불어 참여 작가, 건축가, 연구자, 창작자들이 관람객과 소통하고 함께 체험하는 프로그램도 함께 구성합니다. 개관특별전인 《스토리지 스토리》와 《광채光彩: 시작의 순간들》도 동일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중 개인적으로 눈길이 가는 프로그램은 《스토리지 스토리》의 <지도 제작 워크숍>입니다. 참여 작가인 주용성 작가와 함께 작품을 살펴보고, 지역 리서치를 통해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자리한 ‘창동’ 지역의 유래와 특성을 이해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워크숍입니다. 시민이 직접 참여해 창동이라는 지역을 알아갑니다. 지역과 공간, 사람이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죠.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작품을 보는 곳에서 문화를 만드는 플랫폼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동시대 작가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개관 특별전 《스토리지 스토리》 ⓒ박지수
한국 사진사 흐름을 보여주는 또 다른 개관 특별전 《광채光彩: 시작의 순간들》 ⓒ박지수
서울시립미술관과 연계한 사진 아카이브 구축 사업은 지금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한국 사진사의 체계화에 기여할 예정입니다. 한국 사진사가 한 세기를 뛰어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보존과 연구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사진 예술을 탐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과제도 가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인터랙티브 시스템을 기반으로 관객 참여형 설치 작품 ⓒ박지수
컨셉있는 미술관을 통해 발견한 공간 운영의 지속가능성
해외에는 사진을 공공의 가치로 구현한 사진 특화 미술관들이 여럿 있습니다. 전시 공간을 넘어 지역, 시민과 상생하는 '사진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죠. 대표적인 곳으로 도쿄에 있는 일본 최초의 사진과 영상 전문 공공미술관, 도쿄사진미술관이 있습니다. 전시는 물론이고 영화 상영이나 워크숍과 같은 프로그램도 운영됩니다. 자료 보존과 복원을 위한 연구실도 보유하고 있어 전문 인프라가 풍부합니다. 단순히 미술관의 기능뿐 아니라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며, 시민과 예술가 모두에게 열린 플랫폼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도쿄 에비스에 위치한 도쿄도 사진미술관 전경 ⓒTokyo Photographic Art Museum 인스타그램
국내에서는 대림미술관이 '사진'을 키워드로 해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사례입니다. 2013년 미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라이언 맥긴리의 전시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동네를 뒤집어 놓았다'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통의동으로 불러 모았죠. 이후로 2016년 국내 최초로 영국의 대표 사진작가 닉 나이트의 작품 100여 점을 전시했으며, 2017년에는 사진작가 토드 셀비의 전시도 진행했습니다. 이 같은 사진전시들은 젊은 층에게 대림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대한 인지를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역활성화에도 기여했죠. 실제 통의동 일대의 상업 임대료와 유동인구가 2010년대 중반부터 뚜렷한 상승세를 보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대림미술관 자체가 방문 목적이 되면서 브랜드 가치도 높아졌습니다. 보는 전시에서 참여하는 전시로 운영 방향을 변화하며 전시를 보고 직접 참여하며 제작과 SNS 공유가 진행되며, 이후 전시에 재유입되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죠. 대림미술관이 일상에 예술 감도를 심는 플랫폼으로써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줄 서서 입장하는 전시를 연이어 개최하며 주목 받은 대림미술관. 사진은 2018년 패션 사진작가 코코 카피탄 전시 당시. Ⓒ대림미술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이제 개관한, 첫걸음을 뗀 신생미술관에 가깝죠. 공공 미술관이기 때문에 공공 예산과 문화 정책의 수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만으로는 지속가능한 운영은 어렵습니다. 전시만 하는 공간으로 남기보다 지역과 시민을 연결하는 플랫폼이자, 그 자체로 브랜드력을 가진 공간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운영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사진이라는 장르가 가진 거리감을 해소하고 공공성, 전문성, 경험성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확장되기 위한 계획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기록이 곧 예술이 되는 시대에 공공미술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하나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지 않을까요? 창동이라는 낯선 지역에 빛의 미술관이 자리한 이유는 지리적, 정책적 선택만은 아닐 것입니다. 무채색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회적 모습을 담아낼 수 있는 렌즈이자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공공공간으로서의 기능을 기대한 것이죠.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며, 서울 최초의 사진 특화 미술관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