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파리와 런던이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파리의 부유한 유대인 딜러와 컬렉터들이 뉴욕을 비롯한 미국 도시들로 이주하며, 미술시장은 뉴욕과 런던을 중심으로 펼쳐졌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서구 중심으로 전개되던 미술시장의 지형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시장과 자본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이 일어나는 곳에서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집니다. 미술시장 역시 자산과 권력이 움직이는 쪽으로 시장이 확장되거나, 심지어는 그 중심이 이동하기도 합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중국을 비롯한 한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경제 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초고액 자산가와 중산층이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미술품을 투자 수단이자 문화적 지위의 상징으로 인식하며 컬렉팅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소더비, 크리스티, 필립스 등 글로벌 경매사들은 홍콩과 중국 본토에 진출해 현지 시장의 국제화를 주도했습니다. 특히 기업가와 신흥 부호들은 고가의 미술품을 적극적으로 낙찰받으며 아시아 미술시장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곧이어 홍콩은 세계적인 아트페어 ‘아트바젤’의 선택을 받으면서, 서구 중심의 아트마켓 지도에 아시아도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필립스 옥션 홍콩 아시아 본사 단독 사옥 외관. 1층에 오픈된 경매장부터 6층까지 전시장과 프라이빗 세일즈 전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SPI 리치라운지 라이프스타일팀
미술시장 중심축의 이동: 왜 아시아인가?
스위스 UBS 2024 리포트에 따르면, 2027년에는 아시아의 개인 고액자산가 수가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미술시장이 무작정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요인들이 미술시장을 커지게 하는 걸까요?
먼저 글로벌 갤러리와 아트페어의 진출을 꼽을 수 있습니다. 글로벌 갤러리가 현지에 지점을 내고 세계적인 아트페어가 열리게 되면, 그 지역에서의 미술품 거래도 늘어납니다. 갤러리를 통하거나 아트페어 참여를 위해 영향력 있는 마켓 플레이어들의 유입이 이어지며, 이들을 중심으로 시장 네트워크가 활성화됩니다.
정부의 정책도 주요 요인입니다. 문화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한 투자나 국제 행사,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프로그램을 진흥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경제 활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미술품이 오가는 데 영향을 미치는 세금이나 물류비용, 미술품 매매나 기부에 대한 세제 혜택 등도 미술시장 활성화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아시아 미술시장의 포문을 연 홍콩을 예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겪은 홍콩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문화 사막’이라고 불릴 만큼, 문화적으로 존재감이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찍이 홍콩에서 도는 ‘차이나 머니’를 감지한 글로벌 경매사들은 아시아 거점으로 홍콩을 선택했습니다. 이후 홍콩은 미술품 거래 중심지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2013년 ‘아트바젤 홍콩’ 개최와 함께 이들의 황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하우저 & 워스(Hauser & Wirth), 가고시안(Gagosian) 등 소위 ‘메가갤러리’가 홍콩에 몰려와 아시아에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면세 정책, 지리적 이점, 중국 본토와의 접근성을 바탕으로 홍콩은 이전에 없던 속도로 세계 미술시장의 신흥 강자로 성장했습니다.
데이비드 즈워너를 비롯한 다수의 메가갤러리가 밀집해 있는 홍콩의 H Queen’s 빌딩. ⒸSutton
홍콩에 이어 한국, 싱가포르, 그리고 오일머니로 부를 축적한 사우디아라비아와 두바이 등에서 미술시장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특히 글로벌 아트페어가 진출한 도시를 중심으로 메가갤러리가 확장하고 있고, 이에 발맞춰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인프라 또한 구축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성숙한 서구권 아트마켓의 한계를 느낀 이들이 영리치 컬렉터와 경제 성장력을 갖춘 아시아로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현지에 지점을 열고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메가갤러리들은 로컬 갤러리 또는 컬렉터와의 커뮤니티 구축 및 신진 작가 발굴에 주력합니다. 또한 미술관, 기관 등과의 협력을 통해 관계 기반의 네트워크 형성을 핵심전략으로 활용합니다. 시장의 확장과 네트워크 강화가 더해지며 아시아 미술시장의 외적, 내적 성장이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2026년 2월, 카타르 도하에서는 중동 최초의 아트 페어 ‘아트바젤 카타르’가 개최된다. Ⓒ아트 바젤. 사진: Julius Hirtzberger
아시아 시장의 리스크와 한계
물론 리스크도 존재합니다. 급속한 성장을 이뤘지만 구조적으론 불완전합니다. 시장 구조가 구축되는 중이죠. 특히 홍콩과 중국에서의 정치적 불안정성은 아시아 시장 전반에서 큰 리스크로 여겨집니다. 대규모 시위와 사회적 불안, 코로나 팬데믹을 비롯해 제도 변화로 인한 비용 증가, 작품의 반출입마저도 어려워지는 상황 발생 등 부정적인 여러 상황들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몇몇 글로벌 갤러리는 아시아 거점에 대해 회의적인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컬렉터를 비롯한 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친 미술 교육과 비평 등 문화 담론을 이루는 생태계가 아직 미성숙하다는 점도 큰 걸림돌로 여겨집니다. 이런 약점은 내실 있는 아티스트 후원이나 전시 개최보다는 ‘단기적 유행’에 따른 미술 소비에 그치는 상황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미술품 투자를 단기 자산 증식 수단으로 접근해 과도한 투기를 유발하거나, 극단적으로 폰지 사기와 같은 사태까지 벌어지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아직 갤러리와 컬렉터, 시장 간의 신뢰가 쌓이는 중이라는 점도 유의해야 합니다. 신뢰할 수 없는 시장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신뢰가 쌓이기 전에 시장을 이탈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보니, 거래 자체를 망설이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움츠러든 거래 때문에 관계된 기관이나 기업들도 장기적인 투자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빠른 성장 속도에 반해 아직 미성숙한 시장 구조의 괴리가 시장의 지속 가능성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정책과 시스템 안정성 강화 등을 통해 리스크 요인들을 보완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자산으로서의 미술’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아시아 미술시장의 지속적 확장뿐 아니라 성숙한 시장으로 자리 잡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2024년 아트바젤 홍콩은 문을 닫기 직전까지도 사람들로 붐볐다. 그럼에도 초대형 갤러리를 제외한 갤러리들의 판매 실적은 점점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 SPI 리치라운지 라이프스타일팀
취약한 시스템을 보완하는 힘, 네트워크와 영 아티스트
아시아 미술시장 참여자들은 네트워크를 통한 구조적 한계 극복을 한 가지 방법으로 꼽습니다. 전문가들 역시 아트마켓 내부에서의 네트워크가 리스크 관리의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갤러리들은 전시뿐만 아니라 작가와 함께하는 이벤트를 개최하고, 컬렉터들은 미술에 관심이 생긴 이들, 즉 예비 컬렉터와 함께 갤러리 이벤트를 찾아옵니다. 이벤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또 다른 갤러리를 소개받기도 하고, 큐레이터나 작가를 만나기도 하죠. 갤러리, 큐레이터, 컬렉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시장이 안정화되는 것이죠. 하나의 탄탄한 공급망을 구성하는 것과 유사한 형태입니다.
여기에 영 아티스트가 참여하면 더욱 안정적인 구조가 완성됩니다. 이들이 단순히 떠오르는 작가가 아니라 아시아 미술시장의 지속 가능성과 정당성을 만들어 가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글로벌에서 주목받는 아시아 작가가 늘어난다는 점은 아시아 지역과 시장이 기회가 많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잠재력’을 가진 시장에서 움직이는 아트 씬의 최전선이라는 신호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결국 내부의 구조적 안전성과 함께 시장의 관심도와 주목도를 높이는 역할까지 하는 셈이죠.
아트페어에서는 아티스트의 영향력을 체감할 수 있다. 좌측은 아트바젤 홍콩 2024에서 전시 중인 양혜규 작가 작품, 우측은 프리즈 서울 2024에서 전시 중인 최고은 작가의 작품. 양혜규 작가의 작품은 프랑스 갤러리 샹탈 클로젤에서 8만 5,000유로에 판매되었다. Ⓒ SPI 리치라운지 라이프스타일팀
시장 확장 시기, 컬렉터 입장에서 기회를 잡으려면
이처럼 미술시장의 구조적 변화 시기는 신규 컬렉터에게는 기회입니다. 골든타임에 가깝죠. 갤러리와 기관들은 새로운 고객층을 찾고, 그들과 접점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 활동을 전개합니다. 시장의 룰이 고착화되지 않아 여러 방식이 시도되며, 새로운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단계이기에 진입장벽이 비교적 낮습니다. 작가, 갤러리, 딜러, 기관 등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다양한 분야의 구성원들과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네트워크는 더 촘촘해지고, 시장은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참여자가 들어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장이 커지는 시기에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면, 장기적으로 이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던 아시아와 국내 언더밸류 작가나 작품을 빠르게 캐치한다면, 합리적인 비용으로 높은 수준의 컬렉션을 구축하는 기회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자산가는 선택 이전에 구조를 읽습니다. 그 구조를 읽기 위해선 숫자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시장을 분석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론적인 분석과 함께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경험입니다. 시장을 몸소 느끼고, 시장의 분위기를 파악하다 보면 데이터에서 찾지 못한 차이를 통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부동산 투자에서도 현장을 둘러보듯, 미술시장에서도 임장이 필요한 셈이죠. 요동치는 미술시장에서 살아남는 전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 미술시장에서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은 프리즈 서울을 비롯한 주요 이벤트가 집중되는 늦여름, 특히 9월에 일어납니다. 아트페어 기간 전후로 미술관, 갤러리, 옥션 등 다양한 시장 주체가 VIP 이벤트를 비롯해 네트워킹을 연달아 열며 도시 전체가 미술 씬으로 물들죠. 이 시기는 관람의 기회를 넘어, 시장 구조를 감각적으로 익힐 수 있는 실질적 골든타임입니다. 수치로 읽히지 않는 미술시장의 공기와 흐름은 결국 현장에서만 체감할 수 있으니까요. 미술은 눈에 보이는 자산이며, 그 흐름 또한 시각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성장하는 서울의 갤러리들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특히 서울의 로컬 갤러리와 해외에서 진출한 갤러리들이 각기 어떤 전략으로 전통 컬렉터와 영리치 컬렉터를 맞이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9월을 앞두고 컬렉터가 어떤 시선과 전략을 준비하면 좋을지 더 자세히 짚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