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여름이다. 덥고 습하고 유달리 힘 쏟은 일도 없는데 그냥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싫은 날씨의 연속이다. 여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는 속담은 정말 오싹하고 잔인하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여름에 부지런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런 무서운 말로 게으름 단속을 했을까. 배민도 쿠팡이츠도 없이 엄마들은 기억 속 여름 밥상을 매번 어떻게 차려냈는지 실로 경이롭다.
가만히 있어도 송골송골 땀이 차고 세상만사 귀찮은 한 더위에 지금처럼 방방마다 에어컨의 호사로움도 없던 시절 그 옛날 아빠는 참 용감하셨다. 열무김치 넣고 쓱쓱 비빈 비빔국수를 유독 좋아하셨던 아빠는 여름만 되면 날도 더우니 시원한 비빔국수나 간단하게 해 먹자고 하셨는데 당연히 어머니의 대꾸는 곱지 않으셨다. 가만히 앉아서 상 받는 사람이나 시원하지 비빔국수 만들기가 퍽이나 시원하냐고. 안 그래도 한증막 같은 부엌에서 뜨거운 물 팔팔 끓여 그 앞에 지키고 섰다가 면 퍼지지 않게 삶아내야지. 찬물에 헹궈서 탈탈 물기 털어 이것저것 넣어 무쳐내야지. 대체 누가 시원하고 뭐가 어떻게 간단하냐고. 지금으로 치면 거의 쇼미더머니 드랍 더 비트가 따로 없는 속사포 랩을 쏟아내면서도 결국에는 커다란 양푼 가득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비빔국수를 상에 올리셨다.
그뿐인가. 오라는 재물복은 안 오고 초복, 중복, 말복 아니 복날은 왜 세 번이나 꽉꽉 채워 오는지. 이름 붙은 날마다 기력 보충해야 한다고 받아먹기만 해도 땀을 홈빡 흘렸던 백숙에 녹두 닭죽에 고구마순 김치까지 차려낸 어머니는 분명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였는데 어떻게 그 힘든 여름 부엌을 났을까.
어김없이 여름이 돌아오고 기념일 이벤트를 절대 잊지 않는 식단계의 최수종, 회사 구내식당 영양사님의 라인업에 드디어 초복맞이 삼계탕이 등판했다. 잃어버린 적도 없는 입맛을 더 돋게 하고 지친 육신에 기운을 불어넣어야 할 때다. 임금 수라상에 올랐다는 고급 보양식 민어탕은 나중에 꼭 성공해서 먹기로 하고 여러모로 친근한 국민 보양식 삼계탕을 이쯤에서 먹어줘야 한다. 신기하게도 골프장 근처에는 백숙집이 즐비하고 사무실 근처에는 삼계탕 집들이 많다. 같은 닭이라도 활동반경이 다른 것이 재미있다.
삼계탕의 계절이 왔으면 「강원정」을 가줘야지. 여의도 삼계탕 강자는 40년 전통의 서린빌딩 「파닉스」로 담백한 맛에 전기구이까지 곁들일 수 있어 충분히 좋지만, 늘상 가는 곳이니 복날 주간 기분을 내보려고 점심밥에 진심인 파티원들을 모아 원정을 떠나본다. 원효대교 건너편 용산경찰서 앞 골목길을 살짝 비집고 들어가면 한 눈에도 오랜 맛집의 권력이 느껴지는 한옥 처마 아래 「강원정」 현판이 보인다. 대문 옆쪽으로는 식당 이름보다 훨씬 더 크고 잘 보이게 붉은 글씨로 ‘삼계탕’이라 세로로 씌어 있다. 원조 삼계탕, 서울 3대 삼계탕 이런 수식어는 일절 없다. ‘나는 가수다’ 뭐 이런 느낌으로 ‘나는 삼계탕이다’인가. 활짝 열린 나무 대문을 지나 댓돌 위에 신발을 벗어두고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면 다행히 의자에 앉아 먹는 테이블 형태로 언젠가부터 바뀌었다. 1978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댓돌을 오르내렸을까.

한옥 처마 아래 한자로 쓰인 「강원정」 현판 Ⓒ여의도 먹장금

한옥을 개조해 만든 「강원정」의 모습 Ⓒ여의도 먹장금
성질 급한 식객 성미에 딱 알맞게도 앉자마자 뜨거운 김이 솟는 뚝배기에 담긴 삼계탕이 날라져 온다. 벽에 붙인 메뉴에 삼계탕, 닭도리탕, 인삼주가 있긴 하지만 닭도리탕은 10월 동절기부터 그것도 저녁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고르고 말고 할 게 없다. 반드시 맛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 자신감! “2대를 이어가고 있는 사장님 너무 부럽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벽에 붙인 단출한 메뉴판. 식당 안 사람들 모두가 삼계탕을 먹고 있다. Ⓒ여의도 먹장금
뽀얗고 맑은 국물이 끓어오르는 삼계탕 위에 길게 썬 파채와 해바라기씨가 올려 나오고 갓난아이 팔뚝만큼 길고 무성한 풋고추와 쌈장, 배추김치, 무김치가 찬이다. 야들야들해 보이는 하얀 살코기를 뜯기 전에 일단 국물을 호호 불어 한 입 맛 보면 캬아~ 이 집은 진짜 맑고 진한 국물이 일품이다.

반찬으로 나오는 풋고추와 쌈장, 배추김치와 무김치 Ⓒ여의도 먹장금

펄펄 끓는 뽀얀 국물에 길게 썬 파채와 해바라기씨가 올려 나오는 삼계탕 한 그릇 Ⓒ여의도 먹장금
보통 삼계탕을 국물 중심 탕요리로 생각하진 않는데 여기만 오면 뚝배기를 기울여가며 국물까지 싹싹 비우게 된다. 요즘은 걸쭉한 누룽지 삼계탕, 고소한 들깨 삼계탕, 냄새만 맡아도 침을 뜨고 있는 것 같은 한방 삼계탕, 전복 삼계탕 등등 동네마다 특색있는 삼계탕 맛집들이 많지만 튜닝의 끝은 순정이듯 역시 필자의 최애는 단연코 기본이자 근본의 맛, 「강원정」이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자주 들락거리는 그런 단골은 못되지만 명절에 고향 가듯 여름에 문득 생각나 찾으면 늘 여전한 맛으로 반겨주는 고마운 집이다.
장마가 끝났다는 발표를 듣고 장화를 깊숙이 처박자마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변덕스럽고 때론 지독하고 여름이란 계절은 청춘을 닮은 참 신기한 구석이 있다. 딱히 대단한 일을 했던 것도 아니고 지겨운 무더위를 못 살겠다 미쳤다 욕하며 버텨낸 것뿐인데 막상 지나고 나면 뭔가 되게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낸 기분이 든다. 끝이 없을 거 같은 여름도 금세 간다. 가을 찬바람이 창 틈새로 스며든다고 괜히 쓸쓸해지기 전에 든든한 삼계탕 한 그릇 비우면서 또 한 번의 여름을 치열하고 씩씩하게 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