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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피자를 좋아하셨다. 가끔 우리 집에서 한참을 지내다 가시면 엄마는 홈메이드 사골국이며 가지런하게 모양 잡아 햇볕에 며칠이나 말려서 구운 김부각이며 토란탕, 고들빼기 김치 등등 손 많이 가는 음식들을 잔뜩 차리셨는데 한 번은 가실 무렵에 어째 우리 딸은 피자 한 번을 안 불러주냐 하셔서 모두 화들짝 놀랐다. 그렇다. 맏딸도 몰랐던 외할머니의 최애는 뜻밖에도 피자였던 것이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고 입맛에는 세대 차이가 없다. 나까무라 순사가 실재하고 아사코의 얼굴이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그 시절에 태어나신 할머니에게도 피자는 맛있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왜 할머니가 피자도 햄버거도 좋아하실 거라 한 번도 생각을 못했지?

그리하여 생물학적인 필연으로, 물보다 진한 피의 이끌림으로 인해 그 외할머니의 손녀는 피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한 일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바다가 먼 내륙 지역 사람들은 생선요리를 그다지 즐기지 않고, 부모님이 묵은지를 좋아하지 않는 친구가 겉절이나 막 담근 김치만 입에 대는 걸 보면 이는 분명 맞는 말인데 말이다. “우리 뭐 먹을까?”란 질문에 태어날 때부터 피자라는 옵션이 당연하던 지금의 아이들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필자의 세상에 피자라는 신문물이 운석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첫입에 반했다. 첫 갈비, 첫 치킨, 첫 된장찌개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첫 피자는 마치 첫사랑, 첫 입시, 첫 출근처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석쇠에 구운 인절미처럼 쫘아악 늘어나던 그 치즈의 맛과 향, 화려한 비주얼 그리고 수퍼 디럭스 컴비네이션 피자라는 멋진 이름은 정말 힙하고 세련되고 압도적인 그 무언가였다 

대충 세어봐도 금융회사 숫자보다 많을 것 같은 해장국집들과 순댓국집들의 성지이자 양식의 불모지인 여의도에도 작고 소중한 로컬 피자집이 있다. 대형 프랜차이즈 피자 브랜드 틈바구니에서 꽤 오래 자리를 지키는 중인 <PIZZA PAN PAN 미국 팬피자 전문점>!! 메뉴판 첫 면에 자기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거 좋아한다. 있어 보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프로슈토와 루꼴라를 듬뿍 올려주는 피자도, 화덕에 백자 굽듯 구워 내는 담백한 피자도, 하다못해 배달 피자집들까지 포함해 세상에 맛없는 피자가 있으랴만 보기만 해도 칼로리 연쇄 폭발이 끝없는 미국식 팬 피자는 역시 또 다른 얘기다. 카레는 명백히 인도 음식이지만 일본식 카레를 절대 포기할 수 없고 두툼하고 고급진 히레까스, 로스까스를 두고도 기사식당 스타일 왕돈까스를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섭리랄까?

PIZZA PAN PAN 매장 모습 ⒸSPI 플랫폼 마케팅팀 
PIZZA PAN PAN 메뉴판. 대표 메뉴는 시카고 피자, 디트로이트 피자다. ⒸSPI 플랫폼 마케팅팀 

점심에 피자 한 판 먹을 생각에 아침부터 이렇게 인생이 즐거울 일인가. 후덥지근한 바람을 안고 날 듯이 뛰어가 이미 포토 메모리로 뇌 속에 저장된 메뉴들을 다시 신중하게 살폈다. 대표 메뉴인 피자는 시카고 피자디트로이트 피자 중에 골라서 치즈, 페퍼로니, 파인애플, 포테이토 등등 원하는 토핑을 선택할 수 있다. 어차피 둘 다 deep-dish pizza인데 시카고 피자는 둥근 모양에 두께가 더 두껍고 치즈양이 무거울 정도로 많은 쪽이고 디트로이트 피자는 네모난 모양에 좀 더 테두리 도우가 바삭하게 크러스트 되어 있어서 Team 먹장금의 고정 1선발 라인업이다. 매일 직접 반죽한 수제 도우, 자연산 천연치즈 99%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그럼 1%는 뭘까.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배웠으니까 1%는 쉐프의 손맛인가? 궁금하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는 없다. 아아! 이거지. 일단 맛있다. 더 이상 무슨 분석이 필요하겠는가. 페퍼로니를 가득 토핑한 두툼하고 뜨거운 피자 조각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입에 넣으면 우와 정말 스르륵 혓바닥째 넘어간다. 치즈와 페퍼로니, 혓바닥이 하나 되는 물아일체의 순간! 겉바속쫀 디트로이트 피자를 먹기 위해 이태원까지 가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니 만족도 최상이다

대표 메뉴인 시카고 피자. 치즈가 두껍게 올라간 두툼한 피자.ⒸSPI 플랫폼 마케팅팀
디트로이트 피자. 네모난 모양에 테두리가 바삭한 것이 특징이다. ⒸSPI 플랫폼 마케팅팀

게다가 행복은 홀로 오지 않는 법.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은 시험문제만이 아니다. 메뉴판 끄트머리에 위치한 오븐스파게티 3종과 사이드디시 버팔로 봉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오븐스파게티라니. 알리오 올리오라든가 봉골레라든가 로제에 밀려 찾은 지 오래였던 그 오븐스파게티 말인가요? 나이가 들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많은 걸 잃어간다. 어느 날 갑자기 베니건스가 철수하면서 몬테크리스토를 앗아갔고, 아웃백의 메뉴 변신으로 쿠카부라윙을 잃었다. 이런 상실의 시대에 제목만으로도 먹고 들어가는 대만의 첫사랑 영화처럼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그 맛, 긴 시간 쌓여온 라테(나때)’의 추억을 PIZZA PAN PAN에서 만날 수 있다. 이래서 역사는 현재와 끊임없이 소통한다는 거구나.

클래식하지만 생각보다 먹기 쉽지 않은 메뉴, 오븐스파게티 ⒸSPI 플랫폼 마케팅팀
빼놓을 수 없는 사이드 디쉬 버팔로 윙 ⒸSPI 플랫폼 마케팅팀
여의도 먹장금

여의도 먹장금

"세상에 맛있는 것이 그리 많다는데 늦기 전에 제가 한 번 기미해보겠습니다."

수십 년 간 여의도 증권가에 적을 두고 삼시세끼를 꾸준히 실천해 왔으며, 재건축은 참아도 공복은 못 참는 여의도 구축 아파트 주민으로서 늙지 않는 식탐과 안전 노화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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