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 업무 지구인 CBD는 오랫동안 국내 유수 대기업의 사옥 밀집 지역으로 그 위상을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산 유동화와 조직 변화에 따라, 단독 사옥보다는 임대가 결합된 복합 오피스로 전환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단독 사옥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지역의 랜드마크 포지션을 만들어가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광화문의 KT 사옥입니다.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KT는 앞뒤로 나란히 두 개의 사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뒤편에 D타워와 마주하고 있는 사옥은 이탈리아의 건축 거장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KT 광화문빌딩 이스트(East)이며, 그 전면에 교보생명빌딩과 나란히 광화문광장을 마주보고 있는 건물이 오늘 살펴볼 KT 광화문빌딩 웨스트(West)입니다.
광화문광장 주변의 KT 사옥 위치. Ⓒ배경지도출처=국토교통부 브이월드
1986년 준공된 이래, 웨스트 사옥은 40년 가까이 세종대로의 터줏대감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연면적 약 72,900㎡(약 22,000평) 규모에 달하는 이 자산은 뒤편의 이스트 사옥과 함께 광화문에서도 손꼽히는 대규모 부지에 해당합니다. 세종문화회관, 경복궁 등 주요 명소와 도보 5분 내로 인접한 이곳은 입지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상징성을 지닙니다.
과거의 KT 광화문빌딩 웨스트는 1층의 '올레 라운지' 등 제한된 구역 외에는 외부인이 접근하기에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인근의 상업시설이 있는 D타워, 교보문고로 유명한 교보생명빌딩에 비해 폐쇄적이었죠. 그랬던 웨스트 사옥은 지난 2025년 3분기, 신축 수준에 가까운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마치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새로 짓는 것 이상의 리모델링 전략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던 2023년 KT 광화문빌딩 웨스트의 모습. Ⓒ시티폴리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이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파격적으로 바뀐 외관입니다. 과거 불투명한 마감재와 짙은 색조의 창문으로 둘러싸여 내부를 짐작하기 어려웠던 입면은, 이제 전면 투명한 유리 커튼월로 교체되어 안팎의 시각적 경계를 지웠습니다. 여기에 건물 양측면에 쌍을 이뤄 설치된 거대한 옥외 미디어 파사드는 광화문광장 일대의 야경과 경관을 한층 역동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전면의 KT 광화문빌딩 웨스트 빌딩과 바로 뒤쪽으로 보이는 이스트 빌딩. Ⓒ시티폴리오
건물의 인상을 결정짓는 출입구의 풍경 역시 달라졌습니다. 기존에 담장처럼 앞을 가로막아 심리적 저항선을 만들던 화단 대신, 넓게 트인 공용 출입 공간이 들어섰습니다. 전면을 가리는 요소를 제거하고 개방감을 극대화한 설계 덕분에 보행자들은 '낯선 사옥'으로 진입한다는 심리적 허들 없이 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메인 출입공간을 넓게 틔워 개방감을 주었다. Ⓒ시티폴리오
과거 이스트와 웨스트 사옥을 모두 포함한 마스터 플랜 설계 당시, 렌조 피아노는 웨스트 건물 저층부의 공간 활용 전략으로 '어반 가든(Urban Garden)'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이번 웨스트 사옥 리모델링을 맡은 희림건축은 부분적인 조경과 넓은 폭의 보행 공간을 확보해 개방감을 주면서도, 이 사옥이 광화문광장에서 보다 구체적인 랜드마크이자 모두에게 열린 상업시설로 구현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다채로운 F&B 구성과 지역 특성을 살린 랜드마크 전략
KT 광화문빌딩 웨스트는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 그리고 최상층인 15층에 다양한 F&B 매장과 일부 리테일 매장을 배치했습니다. 오피스 임직원의 일상적인 이용을 지원하는 동시에, 광장을 찾은 방문객과 관광객들이 자연스럽게 머물며 체류할 수 있는 브랜드들로 구성했습니다.
먼저 지하 1층은 임직원과 외부 고객 사이의 캐주얼한 점심 미팅부터, 방문객들의 식사까지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메뉴 구성입니다. 오피스 빌딩 지하 아케이드 식당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찌개나 일반 한식 메뉴 대신 경양식, 초밥, 퓨전 한식, 팬케이크, 타코 등을 제공하는 매장들로 채워졌습니다. 트렌드보다는 선택지의 다채로움과 클래식한 매력을 동시에 확보한 구성이 돋보입니다.
또한 일부 레스토랑에는 KT의 테이블오더 시스템을 도입하여 자연스럽게 KT의 서비스를 체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좌측은 한 매장의 점심 비즈니스 미팅을 위한 메뉴와 좌석 구성. 우측은 테이블에 설치된 KT의 테이블오더 시스템. Ⓒ시티폴리오
공간적으로는 높은 층고 덕분에 지하 특유의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에스컬레이터 주변은 보이드(Void) 공간을 통해 개방감을 극대화했으며, 높게 솟은 기둥형 미디어 파사드가 공간의 개방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접근성 또한 같은 층에 광화문역과 직결되는 연결 통로가 있어 대중교통으로 오는 방문자에게도 편리합니다.
1층부터 지하1층까지 이어지는 기둥형 미디어 파사드. Ⓒ시티폴리오
메인 출입구가 있는 1층은 주변 유동 인구와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머물 수 있도록 베이커리, 카페, 티룸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베이커리 파리바게뜨와 글로벌 브랜드 스타벅스가 각각 특화 매장을 선보였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파리바게뜨는 브랜드의 전통성과 한국적인 컨셉을 바탕으로 광화문 매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스페셜 메뉴와 브런치를 제공합니다. 도심형 프리미엄 매장 컨셉의 스타벅스 역시 지역적 특성을 살린 전용 메뉴와 칵테일을 모티브로 한 음료를 선보입니다.
파리바게뜨 광화문 1945 매장 입구. 최근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케이팝 데몬 헌터스' 프로모션도 눈에 띈다. Ⓒ시티폴리오
국내에서 조금씩 입지를 넓혀가는 차(Tea)를 전문으로 하는 티룸도 갖췄습니다. 이는 커피를 마시지 않거나, 매일같이 마시는 커피를 대신할 음료를 찾는 소비자들에게 좋은 선택지가 됩니다. 1층에 위치한 매장들은 공통적으로 광화문광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조망권을 확보한 것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광화문광장 방향으로 통창이 있어 밝으면서도 클래식한 티룸의 분위기를 갖춘 TWG 매장. Ⓒ시티폴리오
또한 1층에서는 AI를 핵심 동력으로 하는 KT의 비전을 공간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 KT 광화문 플래그십 스토어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공간은 모듈형 구조로 설계되어 브랜드 협업이나 이벤트가 있을 때 조건에 맞춰 스토어를 유연하게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다양한 KT 디바이스와 서비스 등을 체험해볼 수 있는 KT 광화문 플래그십 스토어. Ⓒ시티폴리오
그 위쪽으로 2층에는 광화문광장의 활기를 가장 가깝고도 여유롭게 내려다보면서 식사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가 조성되어있습니다. 지하 1층과 1층의 스타벅스로 대중적인 접근성을 확보했다면, 2층은 특정 메뉴로 유명한 커피 브랜드를 입점시켜 다양성과 개성을 보완했습니다. 또한 미쉐린 가이드 2025에 선정된 레스토랑에서는 광화문 뷰와 함께 한층 여유로운 다이닝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캐주얼하게 커피를 마시며 광화문광장 뷰를 즐길 수 있는 오츠 커피. Ⓒ시티폴리오
시각적인 개방감이 강조된 전면부와 달리, 같은 층의 후면부에는 체험형 전시 공간인 ‘KT 온마루’가 있습니다. 이곳은 1885년 한성전보총국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역사부터 KT의 기술력과 미래 비전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경험 중심 아카이브 역할을 합니다. 광화문이라는 장소성과 일상 속 KT 기술력을 조화롭게 엮어낸 이 공간은, 리모델링과 함께 랜드마크로서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기업의 방향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KT 기술력과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 공간 'KT 온마루'. Ⓒ시티폴리오
평일 낮 시간임에도 가족 단위를 포함해 다양한 연령층의 방문객을 볼 수 있었다. Ⓒ시티폴리오
올해 상반기에는 빌딩의 최상층인 15층에 한화호텔앤드리조트(더 플라자) 계열의 하이엔드 레스토랑 3곳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과거 보안 등의 이유로 닫혀 있던 최고층에 최고급 F&B 프로그램을 배치한 것은, 건물의 상징성과 랜드마크적 가치를 끌어올리려는 전략적인 선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적인 사옥에서 역동적인 랜드마크로의 진화
기존 KT 광화문빌딩 웨스트는 랜드마크로서의 입지적 조건을 충분히 갖췄으나, 정작 ‘대중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임직원과 비즈니스 방문객이 오가는 전통적인 업무 공간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통신업 특유의 보안을 중요시하는 점과 지리적인 특수성 등으로 인해, 그간 사옥의 폐쇄성은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업에 요구되는 정체성이 변하고 사업 영역은 확장되었습니다. AI 시대를 선도하는 기술력과 유연한 변화를 보여줄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이를 표현할 매개체로 KT는 사옥을 선택했고, 재건축을 방불케하는 리모델링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주말이면 고요했던 사옥은 이제 외국인 관광객과 광화문의 유동인구를 품으며 일주일 내내 활기를 띄는 장소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광화문이 옥외광고물 자유표시구역으로 지정됨에 따라, KT 광화문빌딩 웨스트 외벽에도 약 4개 층 높이에 달하는 초대형 전광판 두 개가 나란히 설치되었습니다. 거대한 미디어 파사드는 광고 송출 수단이기도 하지만, 특히 야간에 빌딩의 존재감을 시각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주요한 장치가 되었습니다. 랜드마크 입지에 더해진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해, 기존의 정적인 사옥 이미지에 활력을 불어넣고 광화문 일대의 변화한 야경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끔 합니다.
옥외광고물 자유표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달라진 광화문의 도시 경관. Ⓒ시티폴리오
사옥은 그 자체로 거대한 브랜딩의 장이자 기업의 정체성을 알릴 수 있는 매개체입니다. 과거의 KT 광화문빌딩 웨스트 사옥이 업무 공간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리모델링 이후에는 입지적 특성을 적극 활용하고 랜드마크로서의 위상을 새롭게 다져가고 있습니다. 마주 보고 있는 광화문광장의 흐름을 건물 내부로 연결함으로써, 사람과 문화가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열린 거점을 마련한 셈이죠.
오피스 빌딩 내 상업 공간은 특정 시간대에만 인구가 밀집되는 오피스 자산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간의 활력을 지속시키는 유용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과 같은 풍부한 유동 인구가 있는 입지라면,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자산의 가치는 물론 기업의 이미지 제고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처럼 랜드마크라는 상징성을 정교한 시설 운영과 기획을 통해 브랜드 가치로 연결하는 시도는, 부동산 자산 자체에도 동력을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세 편에 걸쳐 광화문 주요 자산들의 상업공간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리뉴얼의 규모와 구체적인 전략, 자산의 운용 방식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각 자산이 시장에서 취하는 포지셔닝과 지향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존 오피스 자산의 한계였던 '활성화 시간'을 주말까지 확장하고, 주변 유동 인구는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능동적인 방문객으로 포섭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과거 F&B에만 국한되었던 오피스 상업공간 프로그램을 이용자에게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고 기업의 브랜딩을 경험할 수 있는 영역까지 확장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동산은 물리적인 특성 때문에 장기간 고정되어있고 변화를 주는 것에도 제약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공간을 채우는 형태와 구성, 그리고 현장에서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변주를 준다면, 자산은 나름대로의 유동성을 확보하고 생명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이번 사례들을 통해 결국 공간의 가치는 고정된 물리적 실체와 더불어 시대와 호흡하며 만들어가는 가변성에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CBD 권역에 새롭게 확충될 복합오피스 자산들이 도시와 이용자에게 또 어떤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며 진화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시티폴리오
Cityfolio
부동산이라는 그릇에 도시의 변화와 사람들의 움직임을 담아, 투자 감각을 확장하는 인사이트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