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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더커버 미쓰홍」이라는 드라마가 재미나다. 1990년대 후반 IMF 환란 즈음의 여의도 증권가 얘기가 꽤 실감 나게 펼쳐지는데 야만과 낭만이 공존했던 그 시절을 재현하는 자잘한 디테일 고증에 계속 찐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마도 제작진 중에 그 당시 이 동네 회삿밥을 먹었던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극 중 등장하는 「한민증권」 위기관리본부 직원들이 2026년 3월 오늘 바로 회식을 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듯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여의도 월급쟁이들의 30년 밥집 「대동문」을 찾았다.
세월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북 음식점, 「대동문」. Ⓒ먹장금

「대동문」은 평양 출신 사장님이 차린 이북 음식점으로 알려져 있는데 2대째 여의도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 중 한 곳이다. 처음에는 「삼미옥」이라는 상호로 가게를 시작했으나 몇 년간 다른 동네로 이전했다가 1994년에 현재의 「대동문」이라는 간판을 달고 여의도에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이 집의 대표 메뉴는 일단 어복쟁반이다. 이는 냉면과 더불어 대표적인 평양 음식으로 소의 뱃살인 우복(牛腹)이 들어가 본래 우복쟁반이었으나 발음이 바뀌어 정착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둥그런 놋쟁반에 쑥갓, 배추, 버섯, 대파, 손만두, 삶은 계란, 얇게 썬 소고기 양지 등을 가지런히 놓고 육수를 부어 끓여 먹는데 재료가 얼핏 비슷한 만두전골과는 전혀 다른 풍미를 즐길 수 있다. 채소를 우려낸 채수가 베이스여서인지 곰탕, 설렁탕 같은 진한 고깃국과는 또 다르고 고춧가루나 된장 등 부가 양념의 개입 없이 맑고 개운한 국물 맛이 참으로 일품이다. 기름기를 쏙 빼 담백하고 고소한 고기 한 점에다 살풋 익혀 단맛이 나는 대파와 배추를 올린 다음 특제 간장소스에 찍어 한 입 먹으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오늘 이거 먹으려고 출근했구나!

놋쟁반에 소고기와 야채, 그리고 손만두가 담겨 나오는 어복쟁반. Ⓒ먹장금

인당 한 개씩 할당되는 투박한 피의 손만두가 익기를 기다리면서 야채를 추가해 주시는 사장님에게 이 만두를 사입하지 않고 직접 빚으시는 거냐 여쭤보니 가게 앞에 가득 쌓인 배추 못 봤냐 하신다. 모레가 만두 빚는 날인데 그날은 새벽부터 만두 속 만드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고개를 처박고 부지런히 먹고 있으면 사양할 때까지 야채를 계속 채워주기 때문에 적절한 시점을 보아 “제발 그만”을 외쳐야 한다. 자칫 타이밍을 놓치면 성급히 배가 불러서 궁극의 볶음밥과 김치말이국수를 포기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한겨울에도 얼음을 띄워 시원하게 말아 나오는 대동문 김치말이국수는 야외 음악 페스티벌 푸드트럭에서 줄 서서 사 먹는 최고 인기 메뉴 김말국과는 이름만 같지 차원을 달리하는 감칠맛 폭발 찐 맛도리템이다. ‘요즘 관리모드 들어가 줘야 하니까 어복쟁반까지는 아니야 좀 가볍게 가자’ 싶을 때 어복쟁반의 한 그릇 축소판인 장국밥도 간단한 점심 메뉴로 강력하게 추천할 만한데 거기에 녹두전과 이 김치말이국수를 곁들이면 궁합이 그리 조화로울 수가 없다.

 한겨울에도 시원한 맛이 매력적인 김치말이국수. Ⓒ먹장금

하지만 사실 이 전통의 맛집에서 개인적으로 아끼는 취향저격 메뉴는 따로 있다. 필자가 누구인가. 추어탕 명가 「구마산」구마산 편 바로가기에서도 감춰진 옥석, 비빔밥을 발굴하는 자칭 모험가로서 자신 있게 소개하는 대동문의 숨겨진 비밀병기는 바로 차돌박이 구이다. 얇고 결 고운 고기를 바싹 구워 지글지글 철판에 담아 나오는데 입안 가득 퍼지는 차돌박이의 꼬소함만으로도 가히 환상적인 데다 노릇한 마늘, 흰 떡가래와의 삼각 콜라보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어느 누가 이런 위험하고 천재적인 콤보를 고안해 내었는가. 욕심껏 가래떡을 추가까지 하였더니 세상에 매드포갈릭의 갈릭스노잉피자만큼 강력한 비주얼의 가래떡 스노잉 차돌박이山이 날라져 왔다. ‘오늘은 깔끔하게 어복쟁반이나 먹을까?’라는 빌드업으로 꼬셔서 데리고 온 동료들의 눈길이 따갑다.

가래떡과 함께 먹음직스럽게 구워 나오는 차돌박이 구이. Ⓒ먹장금

꽃내음 가득할 줄 알았던 3월에 들어서자마자 중동지역의 전쟁 발발 여파로 여의도 증권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주식 차트의 등락이 거의 놀이공원 롤러코스터 도면급이라 멀미가 날 지경이다. 생각해 보면 증권사 유니폼을 입은 미쓰홍이 길거리 구둣방에서 신문을 보던 시절부터 1990년대 후반 IMF 사태를 지나 08년 리먼발 금융위기도 20년 코로나19 팬데믹 폭락도 갖가지 이름의 그 많은 위기들을 무슨 수로 지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30년 넘는 세월의 한숨도 웃음도 고스란히 기억하는 이런저런 밥집에서 뜨끈한 장국밥에 꽁꽁 언 마음을 녹이면서, 쟁반 바닥에 눌린 죄 없는 볶음밥을 벅벅 긁어 먹으면서, 또 답답한 속에 시원한 김치말이 국수 한 사발 넘기면서 하루하루 보통의 힘든 날들을 지나왔겠지.

여의도 먹장금

여의도 먹장금

"세상에 맛있는 것이 그리 많다는데 늦기 전에 제가 한 번 기미해보겠습니다."

수십 년 간 여의도 증권가에 적을 두고 삼시세끼를 꾸준히 실천해 왔으며, 재건축은 참아도 공복은 못 참는 여의도 구축 아파트 주민으로서 늙지 않는 식탐과 안전 노화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