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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멍, 물멍은 들어 봤지만 이런 날씨는 열멍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더워서 머리가 멍해지고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열치열도 정도껏이지. 찜통더위라는 표현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날씨다. 습한 무더위는 흔히 겪어봤지만 조금만 걸어도 누군가 날 겨냥해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쏘는 듯 온 몸이 따갑게 구워지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반도가 이중열돔에 갖혔다는 2026년 8월의 첫 주를 살아내고 나니 ‘김일성 사망’과 ‘20세기 최악의 폭염’ 키워드로 기억되는 1994년 여름의 역사적 더위 부심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날씨에 짓눌려 만사가 귀찮고 심드렁한데 오직 입맛만이 살아 요동친다. ‘무더운 여름철 잃어버린 입맛을 돋우는 보양식' 이런 문구가 필요한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입맛이 일단 떨어져야 돌아오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마침 늦은 밤 TV 예능에서 오장동 함흥냉면 먹방을 봤다는 핑계로 신의 계시를 받듯 다음날 점심 메뉴가 정해졌다. 여름엔 냉면이지! 고기 먹은 다음 입가심으로 먹는 후식 냉면 말고 냉면 자체가 주인공인 집이 필요한데 비싼 고깃집이 즐비한 법카 타운에서 그런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절제와 담백의 미학, 미식의 근본 이미지인 평양냉면의 슴슴한 멋은 아직 깨치지 못했기에 폭풍검색으로 찾아낸 영등포 일대의 원조격이라는 함흥냉면집을 찾아 금쪽같은 점심시간을 쪼개 강을 건너기로 한다. 

 여의도 방향에서 서울교를 건너 영등포 시장 맞은 편 골목에 들어서면 커다란 갈색 간판이 보인다. 이름하여 <함흥냉면>!  와아, 이 박력 넘치고 자신감 쩌는 네이밍 센스 무슨 일인가. 상호와 메뉴명이 같다. 어떻게 검색해서 찾아가라고? 아니 중국집 이름이 사천탕수육 내지 간짜장인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무려 1967년에 창업했다니 거의 60년이 되어간다. 혹시 정말 맛있으면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 동안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억울해서 어떡하지 쓸데없는 걱정으로 설레는 마음을 다잡고 들어섰다. 

영등포 시장 쪽에 위치한 함흥냉면. Ⓒ먹장금 
매장이 붐비는 만큼 음식 나오는 스피드도 그에 비례한 냉면집. Ⓒ먹장금

허나 필자만 몰랐을 뿐 각종 방송과 유튜브 소개 사진이며 유명인사 싸인들이 가게 한 켠에 이미 가득하다. 회냉면, 비빔냉면(고기), 물냉면, 김치만두, 고기만두, 수육의 알찬 라인업. 냉면 전문점답게 메뉴는 비교적 단출하지만 작정한 것은 모두 있다.

함흥냉면의 메뉴. Ⓒ먹장금 

이 집의 시그니처라는 회냉면을 주전으로 박고 그래도 서운하니까 한 입씩 나눠서 맛이나 보자며 물냉면을 모두의 반찬 삼아 시키고 김치만두, 고기만두를 섞어 반반만두로 주문했다. 앉자마자 육수가 담긴 양은 주전자와 사기 물잔을 내오는데 오오 이것은 추억의 엽차잔이 아닌가. 마늘, 야채, 여러 양념을 넣고 사골을 푹 고아서 만들었다는 이 온육수부터 벌써 만족스럽다. 세로로 골이 패인 갈색 잔에 감칠맛 충만한 온육수를 따라 홀짝홀짝 마시고 있으니 드라이브쓰루처럼 엄청난 속도로 냉면과 만두가 등장했다. 주문 넣으러 간 줄 알았는데 바로 들고 나오신 건가. 어찌나 빠른지 여의도에서 웨이팅 길기로 유명한 콩국수집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나 강 건너와서 냉면 받아드는 시간이나 얼추 마찬가지일 듯하다. 

추억의 엽차잔에 나오는 온육수와 황동색 주전자. Ⓒ먹장금
피가 적당히 얇아 속이 살짝 비치는 만두. Ⓒ먹장금

식초, 겨자를 신중하게 겨눠 넣고 한 치의 여백이 남을세라 꼼꼼하게 샥샥 비비는데 특이하게도 참기름이 비치되어 있다. 오!! 이건 너무 취향저격이라서 위험한데? 반반냉면처럼 냉육수를 자작하게 넣어주고 참기름까지 고소하게 두어 바퀴 돌려준 다음 한 젓가락 맛을 보니 절로 김혜자 쌤에게 빙의된다. 그래 이 맛이야! 고자극을 찾아 헤매던 혀끝을 단숨에 잠재우는 맛있는 양념장은 물론이고 사리 위에 얹은 간재미회도 뻐세지 않고 적당히 쫄깃하며 고구마전분 면발이 탱글하면서도 부드러워 흡족한 탄성이 절로 나왔다.

드라이브 쓰루 마냥 빠르게 나온 비빔냉면. Ⓒ먹장금
식초와 겨자를 겻들이고, 냉육수를 자작하게 넣어 참기름으로 마무리 한 냉면. Ⓒ먹장금

한평생 비빔냉면 외길을 걸어왔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시켜본 물냉면도 맛을 본다. 아, 이런. 한 입으로 끝날 수 없는 맛이다. 매콤 달콤 새콤의 삼각 밸런스가 완벽하다. 기어코 호기심이 돼지를 (배불러) 죽일 수도 있구나. 필자의 영원한 사랑, 만두도 성공적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공장형으로 떼어온 게 아니고 직접 빚은 만두였는데 알맞은 두께감의 보들한 만두피에 소가 아삭한 만두와 물냉면 육수의 페어링이 너무나도 훌륭했다. 국물을 아예 사발째 들이키고 있는 모습에 맞은편에 앉은 밥친구가 놀란다. 냉면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다음엔 그럼 칡냉면 먹으러 갈까? 아니 사실 냉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사실대로 말하기 부끄럽다. 별로 안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는 사람보다 많이 먹는 걸까.

살얼음이 자작해 더 시원해보이는 물냉면. Ⓒ먹장금
몰랐던 맛집을 발견한 기쁨에 신이 나서 접시들을 비우다가 어느 정도 양이 차니 그제서야 매장에 틀어진 음악도 귀에 들어왔다. 백만 년 만에 듣는 Air Supply의 「Without you」 아닌가. 와~ 함흥냉면과 에어 서플라이의 조합이라니. 오래전 듣던 노래를 들으면 그 시절의 나를 관통하는 뮤직비디오가 눈앞에 재생되는 거 다들 뭔지 아시는지? 이 밤을 잊을 수 없다고,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리운 가락이 들려온다. 마룻바닥에 배 깔고 누워 막내 삼촌이 애지중지하던 LP판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듣던 그 아이는 훗날 세월이 흐르고 흘러 무려 40도의 날씨에 추가 냉면사리를 비비면서 이 노래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여러모로 행복한 한 끼였다.
여의도 먹장금

여의도 먹장금

"세상에 맛있는 것이 그리 많다는데 늦기 전에 제가 한 번 기미해보겠습니다."

수십 년 간 여의도 증권가에 적을 두고 삼시세끼를 꾸준히 실천해 왔으며, 재건축은 참아도 공복은 못 참는 여의도 구축 아파트 주민으로서 늙지 않는 식탐과 안전 노화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