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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기업 사옥과 상업시설 저층부의 '비움'을 건물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기회로 전환한 사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시선을 돌려, 상업시설 외에도 전국민이 사랑하는 문화시설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한국에서 '비움'을 가장 먼저, 가장 큰 스케일로 실험해 온 주체는 민간이 아니라 국가였다는 점인데요, 국립중앙박물관은 건물 한가운데를 통째로 비웠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마당의 자리를 먼저 정한 뒤 미술관을 그 주변에 배열했습니다.
공공건축의 비움은 임대료나 매각 차익으로 환산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두 건축은 비움을 설계의 중심에 두었고, 개관 이후 20년과 12년이 지난 지금 그 선택은 서울을 대표하는 도시의 문화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두 기관의 비움이 어떤 계획으로 만들어졌고, 무엇으로 돌아왔는지 살펴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거울못과 열린마당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지붕은 있으나 벽이 없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열린마당'


2005년 10월 용산에 문을 연 국립중앙박물관은 출발점부터 남달랐습니다. 1995년 국내 최초로 국제건축가연맹(UIA) 공인 아래 치러진 국제현상설계에는 46개국에서 341점이 응모했고, 정림건축의 설계안이 당선됐습니다. 연면적 13만 7천 제곱미터, 지상 6층, 길이 약 404미터에 이르는 하나의 긴 건물이 당선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설계 개념은 명쾌합니다. 산과 물, 곧 남산과 '거울못' 사이에 놓인 안전하고 평온한 성곽입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배산임수의 개념을 배치에 그대로 담았습니다. 성곽이라는 개념답게 박물관 그 자체가 두 개의 긴 벽으로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벽 아래 물길은 폭우 때 빗물을 거울못으로 흘려보내고, 타원형의 거울못은 균형과 포용을 상징하는 경관이자 저습지인 대지의 침수를 막는 저수지이기도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 남산 방향 개구부 ⓒ진세인

이 성벽에서 가장 크게 뚫린 자리가 '열린마당'이자,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동관과 서관 사이, 건물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이 공간의 아이디어는 한국 고유의 공간인 마루에서 출발했습니다. 지붕은 있으나 벽이 없고, 실내도 아니지만 야외도 아닌 곳. 열린마당이 필로티가 아니라 마루인 이유는 단면에 있습니다.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올라 다다르는 들어올려진 기단 위의 마당이고, 그 위를 거대한 지붕이 덮습니다.

마루가 방과 방 사이에서 집의 중심이 되듯, 이 마당은 동관과 서관 사이에서 박물관 전체의 중심이 됩니다. 엄숙한 침묵이 흐르다가도 떠들썩한 축제가 열릴 수 있는 곳.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이름 그대로, 박물관 모든 시설 이용이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계단을 올라 마당에 서면, 정면으로 남산과 남산타워가 액자처럼 걸려 있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건축물이 비워낸 프레임으로 도시의 풍경을 담아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 '역사의 길' ⓒ진세인

열린마당 안쪽의 '역사의 길'로 기획된 긴 중앙홀 역시 비워두었습니다. 그 대신 유리로 마감된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관람객들은 어두운 전시실과 환한 복도를 오가며, 광활한 박물관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국가를 대표하는 박물관이 가장 좋은 자리를 전시실이 아니라 빈 마당에 내어주고, 모두에게 활짝 열린 공공건축물로서의 제스처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마당을 먼저 놓고, 미술관을 배열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당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2013년 11월 경복궁 동측 소격동에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비움의 방식이 한층 더 급진적입니다. 두 차례의 설계공모를 거쳐 당선된 건축가 민현준(엠피아트)의 계획은 순서 자체가 뒤집혀 있었습니다. 기능이 규정되지 않은 빈 공간인 '마당'의 위치를 대지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에 먼저 잡고, 미술관의 기능들을 그 주변에 배열한다는 것. 마당이 건축물보다 높은 위계를 갖는 설계로 접근했습니다.
이 순서에는 땅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소격동 165번지는 조선시대 종친부, 일제강점기 최초의 근대식 병원, 해방 후 국군통합병원과 기무사가 차례로 자리했던 땅입니다.
오랫동안 병원과 군부대로 닫혀 있던 이 대지는 북촌과 삼청동의 흐름을 끊는 섬이었고, 기무사 이전 후 활용을 두고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습니다. 용도가 하나로 규정된 거대한 건물은 찬반을 가르지만, 용도를 규정할 수 없는 마당은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매개가 되기에, 건축가는 먼저 비움을 선택했습니다.
계획의 조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경복궁에 면한 대지의 고도제한(12m) 탓에 미술관이 요구하는 대형 전시 볼륨을 지상에 세울 수 없었고, 주 전시장은 지하 7.2m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제약이 오히려 계획의 핵심 전략이 되었는데요, 지상의 건물은 주변 한옥과 골목의 스케일에 맞춰 일곱 개의 건물군으로 잘게 분절됐고, 큰 볼륨을 땅 밑에 감춘 덕에 지상에는 마당과 통로가 남을 수 있었습니다.
기능이 분명한 전시장이 다도해의 '섬'이라면, 그 사이의 빈 공간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군도형 미술관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내부에서 바라본 마당 ⓒ진세인

지하로 내려간 전시장에 빛을 공급하는 것도 결국 비움입니다. 최대 한 변 30m에 이르는 두 개의 비워낸 보이드, 서울박스와 전시마당이 지하 깊숙이 자연광을 끌어내립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울관에는 담장이 없고, 정면과 후면의 구분도 없습니다. 북촌에 놀러 온 사람은 전시를 보지 않고도 마당을 따라 미술관을 가로지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걸어 보면 어디까지가 미술관이고 어디부터가 동네인지, 그 경계가 기분 좋게 흐릿합니다.

동선 계획도 같은 논리입니다. 기본적으로 서울관에는 정해진 관람 순서가 없습니다. 여섯 곳의 입구 어디로든 들어와, 그물망처럼 얽힌 전시장들 사이에서 관람자가 스스로 경로를 고릅니다. 앞사람을 따라 걷는 연속 동선이 아니라, 북촌의 골목을 거닐듯 길을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마당마다 성격도 다르게 계획됐습니다.

삼청길에 열린 '열린마당'에는 수령 150년의 비술나무 세 그루가 중심을 잡고, 북촌길과 만나는 도서관 마당에는 살구나무 아홉 그루를 심어 지갑 없이도 북촌을 즐길 수 있는 조용한 정원이 되도록 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테라코타 외장재와 한옥 지붕 ⓒ국립현대미술관

외장재인 밝은 회색 테라코타는 한옥 암키와의 곡면에서 형태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재료의 눈으로 보면 종친부의 기와도, 기무사의 붉은 벽돌도, 이 테라코타도 결국 같은 흙을 구워 만든 것들입니다. 낯선 재료를 새로 들이는 대신, 이 땅이 오래 써온 재료의 계보 위에 조용히 올라섰습니다.

시간 앞에서도 이 건축은 채우기보다 물러서는 쪽을 택했습니다. 공모 진행 중 대지에서 종친부 유구가 발견되자 미술관은 그 자리를 건물로 채우지 않고 비워두었고, 덕분에 정독도서관에 옮겨져 있던 경근당과 옥첩당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등록문화재인 옛 기무사 건물 역시 철거되는 대신 미술관의 입구로 남았습니다. 

여기에는 무엇을 새로 채울지보다, 무엇을 비우고 남길지를 먼저 정한 건축가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비움이 작동하는 방식


용산과 소격동, 스케일도 표정도 다른 두 건축이지만, 나란히 놓고 보면 같은 전략이 적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은 비움이 잉여 공간이 아니라 조직 원리라는 점입니다. 한쪽은 마당에서 모든 동선이 시작되고, 다른 한쪽은 마당의 자리부터 정했습니다. 채우고 남은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라, 빈 공간이 전체 배치를 결정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생각보다 드문 일입니다.
용적률 인센티브를 받고 조성된 도심의 수많은 공개공지들이 화단과 조형물에 자리를 내주고 아무도 머물지 않는 공간이 된 것은, 대부분 배치가 끝난 뒤 남은 자투리에 비움이 놓였기 때문입니다. 비움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면적이 아니라 배치의 순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당들은 비어 있지만 진공이 아닙니다. 인접한 건축물의 용도와 함께 작동합니다. 꽃을 심으면 정원, 벤치를 놓으면 휴게실, 전시를 하면 전시장. 용도를 못 박지 않았기에 오히려 모든 용도를 받아내고, 그래서 오래 쓰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열린마당이 20년째 공연장이자 쉼터이자 만남의 장소로 살아 있는 이유입니다.
문턱을 낮추는 효과도 있습니다. 두 기관 모두 전시를 보러 왔는지와 무관하게 진입해 머물 수 있는 영역을 최대로 확보했고,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과 마당을 지나는 시민이 같은 공간을 공유합니다. 국립 기관 특유의 권위적인 이미지를 내려놓은 대신, 일상적인 접근성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비움들은 도시와 접속합니다. 열린마당은 남산을, 거울못은 용산의 녹지축을, 서울관의 마당들은 경복궁과 북촌의 골목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비워낸 자리는 건축의 내부라기보다 도시를 연장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가치'가 되는 공공건축에서의 비움


민간의 비움은 결국 회수됩니다. 저층부를 개방한 오피스는 브랜드 가치와 임대 프리미엄으로, 광장을 품은 복합개발은 유동인구와 매출로 그 값을 돌려받습니다. 반면 공공의 비움은 장부에 잡히지 않고,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기능 없는 면적은 이용률과 연면적 효율을 따지는 감사의 언어로는 낭비이고, 넓은 마당과 수공간은 해마다 유지관리 예산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건축이 보여주는 것은, 이 비움에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적을 장부의 칸이 아직 없다는 점일 겁니다. 화폐가 아니라 무형의 가치로, 때로는 더 크게 돌아오기도 하는데요, 가장 먼저 돌아오는 것은 신뢰입니다. 목적 없이도 머물 수 있는 지붕 아래, 담장 없이 가로질러도 되는 마당의 경험이 축적될 때 시민들은 공공 공간을 자기 것으로 감각하게 되고, 그 감각이야말로 어떤 전시보다 오래 남는 공공 기관의 자산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내부의 마당 정원 ⓒ진세인

최근에는 숫자로도 확인됩니다. 아트뉴스페이퍼의 2025년 세계 박물관 관람객 조사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은 연간 650만 명으로 루브르, 바티칸에 이어 세계 3위에 올랐고, 서울관 역시 약 210만 명으로 35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물론 이 숫자에는 화제가 된 전시들의 힘이 클 수도 있지만, 그 관람을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일상의 경험으로 만들어 온 것은 전시를 보지 않아도 드나들 수 있는 마당이었고, 20년간 쌓인 그 신뢰가 관람객이라는 가장 단순한 지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서울관에서는 조금 다른 종류의 가치가 확인됩니다. 이해관계와 역사 해석이 충돌하는 땅에서, 용도가 규정되지 않은 빈 공간은 대립하는 요구들을 중재하는 거의 유일한 답이 되기도 합니다.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일상이 된 오늘의 도시에서 이것은 하나의 설계 기법을 넘어, 공공 프로젝트를 풀어가는 방법론으로도 유효할 것입니다.

공공의 비움은 시장의 기준점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글에서 다룬 민간 저층부 개방 전략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이 이미 공공의 마당에서 열린 공간의 가치를 경험해 온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두 국립 기관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공공건축의 비움은 예산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좋은 땅의 가장 좋은 자리를 시민의 빈터로 내어주겠다는 판단이 먼저였고, 그 판단이 20년, 12년의 시간을 지나 서울에서 가장 사랑받는 공공 공간들을 만들었습니다. 용산공원과 대형 공공 프로젝트들이 이어질 앞으로의 서울에서 좋은 계획안을 가르는 기준 역시, 먼저 공개되는 조감도에 무엇을 채웠느냐만은 아닐 겁니다. 눈에 바로 보이지 않는 가치까지 설계에 담을 수 있는지, 발주처와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안목이 그 답을 결정할 겁니다.

우리는 비움을 대개 눈으로 받아들입니다. 널찍한 마당과 낮은 스카이라인, 건물 사이의 여백이 주는 시원함에서 감상이 멈추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설계 과정에서 공들여 고안된 그 빈 공간의 기능과 효과는 쉽게 지나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잘 계획된 비움은 풍경이기 이전에 일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빛을 지하로 끌어내리고, 동선을 열고, 충돌하는 요구를 중재하고, 도시를 건물 안으로 이어 붙입니다.

그러니 어떤 공간의 여백 앞에 서게 되면, '왜 비워뒀을까' 대신 '이 비움으로 무엇이 가능해졌을까'를 물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 질문은 국립 기관의 마당에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검토 중인 계획안의 공개공지에도, 사옥 로비의 한 켠에도, 동네의 작은 공터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 비움이 있다면, 그곳은 면적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계획의 순서에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두 국립 기관의 비움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얼마나 큰 가치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20년째 증명하고 있습니다. 건축은 채워서 완성되기도 하지만, 비워서 오래가기도 합니다.

진세인 / JIN SEIN

진세인 / JIN SEIN

공간교과서 대표

건축 실무를 기반으로 공간을 해석하고, 콘텐츠와 커뮤니티로 확장해온 공간 기획자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입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건축·공간 콘텐츠 채널 ‘공간교과서’를 운영하며, 건축을 매개로 도시·라이프스타일·브랜드 경험을 읽어내는 글과 콘텐츠를 제작해 왔습니다. 전문가의 언어와 대중의 감각 사이를 잇는 이야기 방식을 통해 공간을 ‘보는 대상’이 아닌 경험되고 기억되는 장면으로 전달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