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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조그 앤 드 뫼롱
서구룡반도에 자리 잡은 엠플러스의 대표적인 야경 ⓒwestk.hk 홈페이지 

"대체 건축주가 누구시길래, 이렇게 거대한 미술관을 만들려고 했을까?"라는 질문이 절로 시작되는 공간이 있다. 최근 방문한 미술관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홍콩 서구룡반도의 엠플러스(M+)다. 요즘 인스타 피드에 난무하는 감상 표현처럼 '충만'하고 '울림' 있는 공간이라 하루 종일 머물고 싶었던 건 아니고, 워낙 거대한 공간이라 대충 둘러봤음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물론 머무는 동안 '이 공간에 있는 나 자신 너무 멋져' 분위기의 사진도 많이 찍었다. 나와 예술과의 서먹한 관계와는 별도로 그저 공간을 거니는 경험만으로 꽤 만족스러웠던 시간을 회상하며, 이 거대 미술관의 건축주와 건축가에 대해 떠올려본다.  

누가 짓고, 누가 운영하는가


일단 궁금했던 건축주부터 찾아봤다. 이름이 꽤 길어서 이 글을 쓰고 나면 잊어버릴 것 같은데, 서구룡 문화지구청1이다. 이는, 홍콩 정부 산하의 공공기관으로, 서구룡 문화지구2(WestK) 조성 프로젝트를 총괄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나라식으로 바꿔 생각하면, 국가가 어느 거대한 땅을 문화지구로 만들기로 결정한 후 LH와 문체부를 더해 독립 조직을 하나 만든다고 상상하면 된다. 그 조직이 토지를 개발하고 건물을 짓고, 나중엔 운영까지 맡는 식으로 말이다. 이 거대한 미술관이 생기게 된 배경을 찾아보면, 홍콩정부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던 1997년 전후로 홍콩에 문화시설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수년 간의 마스터 플랜 계획을 통해 지금의 서구룡 문화지구를 조성했다고 한다.3 지난 5월에 방문했을 때 아직 도로나 공원 등의 인프라 공사가 덜 끝난 매립 신도시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마스터 플랜을 찾아 비교해 보니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 웨스트케이(WestK)라고 칭하는 서구룡 문화지구의 주요 건물들이 어느 정도 완성된 모습으로 보였다.4
웨스트케이의 주요 건물이 표기된 도면, 2024.11 ⓒHarbourfront Commission 공식 배포 
웨스트케이 내 지어진 건물들을 볼 수 있는 항공사진 ⓒwestk.hk 홈페이지
 

공공건축의 건축주와 요구조건


공공기관이 만들고 운영하는 엠플러스는 공공건축에 속한다. 그리고 공공건축의 건축주는 여러 사람이다. 그리고 실제 사용자가 아닌, 주로 민원을 상대하거나 부처의 실적을 올리려는 집단일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실제 사용자의 목적 전달이 모호해지고, 설계와 시공을 진행하는 오랜 과정 중에 정권교체 같은 이슈로 의사결정 주체가 바뀌며 목적이 바뀔 때도 있다. 한참 설계하는 도중 잠깐, 이 건축물이 목적이 있었나? 지경이 되기도 한다. 건축주가 여러 목소리, 상호 모순되는 요구조건을 내거는 것만큼 건축가에게 피곤한 일이 또 있을까. 출입구 열쇠를 건축주에게 건네는 순간까지 ‘아… 저걸 저렇게 하면 안 되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안 그래도 수많은 결정장애를 수반하는 처지일 텐데 말이다. 미안하게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공건축을 수행하는 건축가에게는 기본적인 공공건축의 개념들을 관계자에게 주입하고, 양질의 공공건축이 될 수 있도록 단순한 표어, 목적 값을 찾아줄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건축가는 건물이 지어지는 지난한 과정, 지어지고 난 뒤 운영하면서도 그 명분을 잃지 않게 해주는 길잡이가 되어줘야 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건축가에게 설계비 대비 너무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 같은데… 길잡이가 ‘되어주면 좋을 것이다.’라고 정정하겠다.
공공건축은 아현에서 신도림으로 환승하는 지하철을 타면서 '출산 장려'라는 캐치프레이즈에 환멸을 느끼는5 어느 시민을 위한 도시 인프라 건축일 수도 있고, 문화, 환경, 커뮤니티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건축일 수도 있다. 대중에게는 이런 당연하게 탑재해야 할 기능보다 오히려 상징성이 목적이 되어 쩌렁쩌렁한 랜드마크가 되려고 하는 특성이 강조될 때 직접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공공건축의 요구조건은 다양한 건축주만큼이나 다양하다. 건물 하나로 지역의 팔자를 고치려 드는 건가 하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요구를 물리적 공간으로 구현할 건축가를 찾는 일은 여간 호들갑스러운 일이 아니며, 일정 규모 이상은 현상설계6를 통해 건축가를 선정한다. 5~10개의 회사를 지명하여 그 안에서 선정하는 방식도 있고, 일정 규모와 실적을 갖춘 회사들만 지원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방식도 있으며, 모든 건축사사무소가 지원할 수 있도록 개방된 방식도 있다. 지으려는 건축물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가장 잘 파악하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회사를 찾기 위해 도시, 건축, 기타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 위원단의 자문과 평가를 거쳐 최종 결정을 내린다. 이러한 건축주의 수많은 요구는 현상설계를 개시할 때 배포되는 현상설계 지침서(RFP, Request for Proposal)라는 문서에 담기게 된다. 나 역시 설계사무소에 몸담으며 수많은 현상설계 지침서를 접했고, 공고부터 현상설계 마감 전까지 경전 삼아 매일 읽어댔다. 읽다 보면, 건축주가 만든 지침대로 설계하고, 이 건물에 세금을 써야 하는 명분을 잘 찾아주는 건축가, 지침서는 꾸역꾸역 만들었지만, 사실은 건축주 자신에게도 모호했던 목적을 또렷하게 밝혀주는 건축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내외적으로 그러한 슬로건을 잘 끌어내는 건축가가 이 프로젝트의 설계권을 쟁취하고, 건축주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내가 이해한 현상설계 과정이다.
 

공공건축 현상설계와 엠플러스의 건축가 


엠플러스 프로젝트의 건축가는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 H&dM)이다. 국내에서는 송은문화재단 신사옥 설계(21년 준공)와 23년 12월 서리풀 보이는 수장고의 설계 당선자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서리풀 수장고 프로젝트는 대규모 개발사업에 속한 기부채납 시설임에도 국제 공모로 진행되었고, 1,000명 가까운 시민에게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며 유튜브 생중계까지 이루어져 근래 보기 드문 건축 판의 빅이벤트라 할 만했다. 사업의 규모도 놀라웠지만, 중앙에 원뿔 형태의 아트리움을 두고 상부 카페에서 4면이 열린 단순한 형태로 당선을 거머쥔 점도 인상적이었는데.7 이 위치에 이런 생김새를 가져야 할 단순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안이 당선이 된 느낌을 전달받았다. 건축가의 자의식으로 가득해 듣는 이에게는 모호한 언어, 혹은 동선과 기능상의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대중에게 단순화해 전달하기 유리한 '한방'으로 공공건축 설계권을 쟁취하는 서사처럼 느껴졌다. 물론 해외 건축가에게 유독 관대한 현재 국내시장 분위기가 한몫하는건…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서리풀 개방형 수장고 당선안 ⓒ헤르조그 & 드 뫼롱 홈페이지 

 

서구룡반도의 랜드마크가 된 엠플러스


엠플러스 프로젝트에서 헤르조그 & 드 뫼롱이 찾은 단순한 서사는 무엇이었을까? 이 프로젝트의 공모 심사평과 설계 스토리에서 공통적으로 'found space'라는 개념을 언급한다.8 대상지 하부를 관통하는 지하터널이 있는데, 그것을 회피하면서 설계하지 않고 그 공간을 ‘found space’라 명명했다. 지하 구조를 그대로 살리고 그 위에 미술관을 짓는 과감함에 대한 기사들이 생산, 복사되고 있었다. 고개가 끄덕여지려다가, 건축적인 과감함은 호감이 가지만 대중을 설득할 만한 공공건축물의 설계 컨셉으로는 좀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꽤 오래 건축 답사를 주제로 한 잡글을 올리는 블로그를 운영해 온 터라, 주변에서는 내가 건물을 방문하기 전에 엄청난 사전 조사를 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일단 가서 현장감을 먼저 느끼는 쪽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처럼 다녀온 건물을 뒤늦게 조사하다가 "아, 이런 특징이 있었네?" 하고 뒷북을 치며 아쉬워하는 경우가 잦다. 그럼에도 어떤 건물을 마주했을 때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느낌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은 것이 이 방식을 고수하는 나름의 이유다. 공간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자체에 회의감마저 드는 복잡한 건축가의 언어로 잔뜩 도배된 설명을 접한 뒤 현장의 건물을 마주하고, 전혀 납득 안 될 때의 실망감이 싫다. 반면 중요한 특징이라고 설파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해 아쉬울 땐 또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 건물 역시 아묻따9 위치와 건축가, 개략적 규모만 파악한 채 일단 보자는 식으로 ‘found space’ 같은 디자인 키워드 습득 없이 방문했다. 지하구조물 같은 내용은 사전 조사가 없었기에 대단함을 알아채기 힘들었다. 그 보다 이 건물을 보자마자 건축가가 참 영리하다고 생각했는데, 홍콩의 초고층 건물들이 하늘로 솟구치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와중에, 엠플러스는 오히려 낮고 넓게 땅에 눌러앉는 방식으로 승부를 보려는 듯했기 때문이다. 110m 폭의 네모반듯한 타워를 세우고, 전면을 감싸는 미디어 파사드로 남다른 존재감을 만들어냈다.
서구룡반도에서 홍콩섬을 바라본 모습 ⓒ헤르조그&드 뫼롱 홈페이지 
외장에는 대나무 모티브를 적용했고, 초록빛이 감도는 유광 테라코타 타일이 대나무처럼 엮이며 입면을 반복했다. 암키와와 수키와를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반전은 당연히 금속이라 생각하고 가까이 가서 만져보니 맨들맨들한 유광 타일이었던 점이다.
유광타일로 대나무 모티브를 적용한 외관 모습 ⓒ최차장 
겉보기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박스 위에 납작한 타워가 얹힌 단조로운 조합처럼 보이지만, 내부 구조는 꽤 입체적으로 설계되었다. 2층 전시 갤러리는 반듯한 직사각형으로 정리돼 있고,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사선으로 살짝 비틀어 배치했다. 층마다 다른 높이의 오프닝, 깊은 통로 끝의 창, 사선으로 지나가는 동선은 무거운 박스 안에서 다양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고정된 틀 안에서도 관람자의 시야를 열어주는 장치들이었다.
입체적인 설계를 모여주는 내부 모습 ⓒ최차장  
지하 공연장 상부에는 야외 계단을 조성해 놓았다. 자연스럽게 홍콩 특유의 풍경인, 휴일마다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이 모이는 장소들 중 하나가 되었다. 나 역시 그늘에 앉아 잠시 땀을 식혔다.
지하 공연장 상부는 야외 계단을 조성했다. ⓒ최차장 
방대한 전시와 강렬하게 연출된 물리적 요소들, 엠플러스는 외국인 방문객이 반나절 이상 머무르고, 홍콩 시민이 공원 피크닉과 함께 방문하면서 서구룡반도에 하루 종일 머무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건물 전면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 ⓒ최차장 
엠플러스 단면도 ⓒ헤르조그&드 뫼롱 홈페이지 

 

공공건축은 대중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컨셉이 필요하다


공공건축에는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컨셉, 그 컨셉이 그대로 구현된 물리적인 형태가 있으면 더 소통하기 유리하겠다고 생각했다. 엠플러스 역시 단순한 형태적 컨셉(낮은 빌딩, 단순한 포디움 외형과 그 안의 오프닝 공간을 비틀어 만든 변화)이 명확히 전달되도록 잘 지어 올린 공공건물이라 방문할 만한 매력을 갖는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이 다시 나 자신에게 돌아왔다. 나는 어떤 설계를 해왔을까? 수많은 현상설계 실패 경력을 가지고 있는 나의 포트폴리오를 돌아본다. 떨어진 이유가 납득이 안 될 때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네가 한 걸 왜 뽑아야 해?"라는 질문에 "제가 열심히 했으니까요" 같은 답변밖에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 신입 시절, "건축주에게 빙의해서 생각하라"는 어느 선배의 말은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고, 시키는 대로 하기도 힘든데, 건축주 입장까지 이해하는 건 꿈 같은 소리였다. 그럼에도 회사일 외에 현상설계에 참가해서 상을 받았던 경험이 있긴 하다. 어느 역사적인 장소에 대한 건축 아이디어 공모전이었는데, 길 한가운데를 다 뽀개서 사람들이 바닥만 내려다보며 걷게 하는 단순한 아이디어로 상금 300만 원을 받은 적이 있다. 단순한 컨셉과 직관적인 형태였다. 그러나 공간이나 그것을 설명하는 언어는 매번 이렇게 단순 명료화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건축을 단순 기술용어로 설명할 수 없어 건축가들의 모호하고 현학적인 언어가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수많은 관계자들에게 "이 디테일 꼭 이렇게 해야 함?", "이 공간 없애면 안 돼요?", "이 재료 꼭 써야 돼요? 굳이? 이렇게까지?" 등등의 질문을 받았을 때,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대답할 수 있는,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컨셉이 있으면 유리할 것이다. 긴 프로젝트를 끌고 가야 하는 건축주에게 단순하지만, 강력한 표어가 필요하니까. 공공건축을 다루는 조직에서는 아마 더 그렇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1 서구룡 문화지구청, 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 Authority - WKCD Authority
2 서구룡 문화지구 (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 -WestK) 
3 https://en.wikipedia.org/wiki/West_Kowloon_Cultural_District 의Development and history
4 입법회보고서 (2024.11) 중 주요 WKCD 시설의 배치(Batching) 및 목표 완공(개장) 시기. https://www.legco.gov.hk/yr2024/english/brief/cstb202407_20240717-e.pdf
5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6 현상설계: 건축주가 다양한 설계안을 공모로 모집해 최종안을 선정하는 공개 설계경쟁 절차.
7 https://competitions.org/2023/12/seoripul-open-storage-museum-in-seoul
8 파운드 스페이스(Found Space)는 건물 부지 아래를 지나는 공항철도 터널의 윤곽을 따라 굴착된 거대한 전시 공간 https://www.mplus.org.hk/en/the-building/design/
9 아묻따 :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의 줄임말
최차장

최차장

최차장

건축사 최차장은 10년 동안 건축설계를 하며 건축주의 의도를 읽지 못해 혼란을 겪었다. 최근 4년 동안은 시행사에서 건축주 대변인으로 활동 중인데, 의도를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언젠가 본인의 프로젝트에 활용하고자 여러 도시와 지역을 돌아다니며 건물의 목적값 구현 과정을 상상하고, 그 해석 내용을 글로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