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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연재를 시작하기 위해 SPI 플랫폼 마케팅팀과 했던 기획 회의는 낄낄거림이 반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꽤 의미 있는 회의였다. ‘건축주의 목적 값’에 따른 건축물이라는 주제로 카테고리를 나누는 시도를 해봤는데 ‘공공건축’, ‘건축주의 꿈을 이뤄주는 건축’, ‘자본주의 건축(민간 개발사업)’, 이 세 가지가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건물들의 초기 목적값이었다. 
위험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건축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 흥미롭다. 앞으로 이 세 개의 프레임을 번갈아 적용하며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예정이다. (다양한 건축 답사기가 쏟아지는 요즘, 최차장 시리즈의 차별점이라면 이 정도다.)
앞의 두 편에서 ‘건축주의 꿈을 실현하는 건축물’과, ‘공공 건축’을 다뤄보았고, 이번 편에서는 SPI에서 주로 다루는 건축이자 이 시리즈에서 ‘자본주의 건축’이라고 다루는 민간개발사업1의 경우를 들여다보려 한다.
 

개발사업으로 짓는 건물의 목적 값 개발이익


개발사업에서도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한다. 도시를 진보시키고, 그 자체로 아름다워야 하며, 사용자를 위한 편리 기능을 탑재해야 하는 등의 목적 값을 설정하는데, 만약 최종 목적 하나만 남긴다면 그것은 ‘개발이익’이다.
간혹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매력적으로 들리는 “우리는 다른 개발사업처럼 이익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디 내놓기에 부끄럽지 않은, 건축물을 만들고 싶어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메시지 안에 너무 당연해서 생략된 전제조건이 있다.
‘이익이 나지 않는다면 이 개발 사업은 시작도 하지 못한다’, ‘멋진 건물을 만드는 이유도 개발이익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다’.
개발사업에서는 처음에 잡아놓은 ‘개발이익’이 설계부터 준공 때까지 줄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거의 다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문장이 술술 써지는 게 약간 소름이긴 한데 까만색 캐드화면을 보는 시간보다 하얀색 엑셀화면을 보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렇게 되었다.2
 

민간개발사업에서의 건축가 – 경험과 가성비


개발이익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진 민간개발사업에서는 어떤 건축주와 건축가의 만남이 유효할까? ‘개발이익을 잘 찾는 엑셀의 귀재’와 ‘공사비 절감요소를 잘 찾는 VE3천재’의 만남이 정답일까?
우선 건축가를 찾는 일부터 이야기해 보자면 건축주는 주거시설, 상업시설, 오피스, 시니어관련 시설 등 개발하려는 용도에 따라 유사 프로젝트 경험이 있는 건축설계사무소와 담당자를 먼저 찾아보게 된다. 비슷한 용도를 설계해 봤기 때문에 시행착오와 유사한 고민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거기에 자본주의 건축을 ‘잘’만든다고 생각되는 건축가의 특징 중 하나를 추가한다. 속된말로 전용률을 잘 ‘뽑고’, 사업수지가 잘 나오도록 법정 용적률을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꽉 채워주는 능력’인데, 기본전제 같은 것이라 이 부분이 삐걱대면 "건축가와 건축 이론가 대다수는 건축을 돈과는 무관한 진공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믿고 싶어 한다.”4라며, 건축가에 대한 불신이 생기기도 한다.
추가적으로, 분양이나 매각에 홍보요소가 될 만한 사항은 크게 부각시키고, 공사비 상승요인은 배제해 나가는 협업이 가능한 한 건축가 팀이 민간개발 사업의 키가 된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쓰다 보니 자본주의 세상의 자본주의 건축은, 복잡한 하루하루의 업무 대비 꽤 노골적이며 단순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위 문단에서 서술한 것을 압축하면 건축가의 능력은 ‘경험과 가성비’다. 과연 그것이 답이 될 수 있을까? 지난 홍콩답사는 과잉 밀도와 급변하는 입지 경쟁 속에서도 살아남은 건물들을 만날 수 있는 경험이었는데, 극한의 자본주의 도시 홍콩에서 다른 답이 될 수 있는 자본주의 건축을 하나 발견했다.
 

쇼핑몰 없으면 안 돌아 가는 도시 홍콩에서의 쇼핑몰


민간개발사업의 대표적 용도인 상업시설, 쇼핑몰5천국인 홍콩을 돌아다니며 “이 도시는 쇼핑몰이 없으면 안 돌아가겠는데?”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무조건 쇼핑몰을 거쳐야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역들이 많았고, 사악한 더위를 피하기위해 틈만 나면 가까운 쇼핑몰로 들어가야 했다. 도시 가이드북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OO쇼핑몰의 N층과 연결되어 있는 OOO.” 이런 식으로 쇼핑몰이 주요 장소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쇼핑몰은 도시 인프라처럼 작동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경험과 사례가 넘치는 만큼, 홍콩의 쇼핑몰에 가면 보이는 게 많을 것이라 기대했다. 다만, 상업시설 설계를 오래 다뤄 왔음에도 쇼핑몰에만 가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관계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돌아볼 대상을 고르고 골라야 했다. 선택된 곳 중 하나는 어드미럴티에 있는 퍼시픽 플레이스(Pacific Place) 쇼핑센터다. 이 건물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성공한 상업시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설계자 선정 과정에서도 시사점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홍콩 최초나 최대 상업시설은 아니지만, 복합개발의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80년 후반에 준공되어 아직까지 살아 남아있는 쇼핑몰이라는 의미도 있다.
홍콩 어드미럴티에 위치한 퍼시픽 플레이스 저층부 상업시설 외관 ⓒ스와이어프로퍼티스 홈페이지

 

퍼시픽 플레이스 리모델링 디자이너 – 경험을 기반으로 찾았을까?


퍼시픽 플레이스는 홍콩에서 영향력 있는 개발회사 스와이어프로퍼티스(Swire Properties)로컬설계사 웡앤오우양(Wong & Ouyang (HK) Ltd.)이 1982년에 개발을 시작해 1988년 1차 개장을 했다. 이후 2006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헤더윅 스튜디오 (Thomas Heatherwick Studio)가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그렇다. 또 헤더윅이다. 지금 서울시에서 진행 중인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총감독, 그가 제시한 주제가 나를 갸웃6하게 만든 것과 달리, 그를 뮤즈 삼은 듯한 서울시를 발판 삼아 지금 한국에서 그는 절대적 설계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퍼시픽 플레이스의 리노베이션 설계사로 선정된 2006년 당시, 그는 지금처럼 글로벌한 건축가는 아니었다.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실험적인 공공설치물을 선보이던 젊은 건축가였는데, 2010년 상하이 엑스포 영국관으로 유명해졌으니, 아시아에서는 더욱 잘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였다.
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Expo) 당시 영국관. 헤더윅 스튜디오가 설계, 수만 개의 아크릴 막대 끝에 씨앗을 삽입한 파격적 디자인 ⓒ헤더윅 스튜디오 홈페이지 
리모델링 전 퍼시픽 플레이스 쇼핑몰 ⓒ헤더윅 스튜디오 홈페이지
퍼시픽 플레이스의 리모델링 당시 이 공간은 베테랑 건축가가 풀어낼 만한 기술적, 행정적 솔루션보다는 감각적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 형태와 디테일에 시간과 열정을 갈아 넣는 활력 있는 디자인팀이 필요했을 것이고, 헤더윅을 초청하였다. 여기에서부터 경험이라는 앞서 세운 전제조건 중 하나가 깨진다.
 

퍼시픽 플레이스 둘러보기 가성비는 어디 갔지?


복합시설단지 내부 도로를 걸어 One Pacific Place 저층부 투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쇼핑몰로 진입했다. ⓒ최차장
엘리베이터 손잡이와 버튼 디자인부터 심상치 않다. ⓒ최차장
헤더윅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 제작 사진을 보면, 디자인과 제작에 꽤 많은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헤더윅 스튜디오 홈페이지
쇼핑몰 골용부의 천창이 외부에서는 유리 바닥이다. 미끄럼 방지용 논슬립7을 중심에서 확장되는 모양으로 유리 패턴디자인을 했다. 바닥으로 봐도 재밌는 디자인이고 실내에서 보아도 빛이 자연스럽게 확산되는 효과가 있다. ⓒ헤더윅 스튜디오 홈페이지 ⓒ최차장
바닥톤을 우아하고 따뜻한 톤으로 재정비하고, 원형기둥에 맞닿는 부분의 마감을 부드럽게 처리했다. ⓒ최차장
쇼핑몰의 디테일들을 관찰하면서 '이렇게까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디자이너만 알아볼 법한 디테일을 구현했다는 느낌도 들었고, 당시에는 기성재를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자체 제작을 해서 단가를 올리고 공기를 길게 만드는 디자이너의 유희로 치부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전형적인 개발사업 건물이라 할 수 있는 판매시설에서 이런 과감한 미적인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기회와 능력에 대해 ‘부러움’ 이상의 전율이 느껴졌다.
헤더윅 스튜디오의 최근 주요 건축 프로젝트들 ⓒ헤더윅 스튜디오 홈페이지
최근까지 헤더윅 스튜디오는 위와 같은 대담한 형태를 실험해 볼 수 있는 대형 수주기회들을 무수히 쟁취하며 그만의 시그니처를 굳혀 가고 있다.
반면 퍼시픽 플레이스 리모델링 시절에는 훨씬 작은 스케일의 디자인에 천착했다. 엘리베이터 버튼, 공들여진 키오스크와 사이니지, 기둥을 감싸는 수벽의 곡선, 천창의 논슬립으로 만든 패턴 등 손에 닿는 여러 가지들이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매우 촉각적인 디자인(a highly tactile desig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매스8 자체의 휘황찬란함으로 건물을 재정의하기보다 조금 더 우아하고 온화한 톤으로 재정비하고, 손으로 닿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디자인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업들은 언뜻 보면 내가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에) '이렇게까지??'라고 생각이 든 것처럼, 가성비 떨어지는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과 디테일이 모여서 이 공간을 다시 찾게 만들기도 하고, 요즘처럼 공간경험의 수준이 올라간 시대에 오히려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영리한 자본주의식 디자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돈 얼마를 들여서 디자인을 하고 그래서 방문율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마케팅비를 얼마를 써서 매출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알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정량적 매출 연결 지점이 끝내 파악되지 않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무조건적인 절감 보다는 이런 디자인적 가치를 아는 사람들의 투자가 상업공간 전문가들이 강조해 온 ‘판매시설 내 공간경험과 체류시간 늘리기’라는 공간적 성공을 불러오는 것 같다. 
 

민간개발사업에서 건축주


나랑 비슷한 연배의 스타로드자산운용 이대표님과 만나 가끔 수다를 떤다. 투자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시는데, 죄송하게도 거의 못 알아듣는다. 결국 막판에는 건축 이야기만 신나게 하다가 헤어지곤 한다.
어느 날 대표님 왈,
"이익도 이익이지만 투자자한테 뭐라도 어필하려면 당연히 전용률과 가성비만으로는 부족하지, 나 제대로 된 건물 만들어보고 싶어서 운용사 직접 차린 건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 이제 건축가는 더 노력해야 되는 세상이구나. 가성비를 넘어 디자인 표현의 한계까지 고민하며 그 균형감을 잡아야 하는구나’.
건축가에게는 지금도 ‘갖춰야 할 덕목 리스트’가 수두룩한데 이렇게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다. 자 그럼, 건축주는 어떤 덕목을 가져야 할까?
건축주 사이드에 있으면서 느끼는 건, 대부분 사용자 친화적인 언어로 중무장한 건축가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축가들 중에는 다소 말이 화려하지 않고 투박한 듯하지만,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는 숨은 실력자들도 많다. 헤더윅처럼 화술은 뛰어나지 않지만 디자인과 문제해결 능력을 제대로 탑재한 실력자들 말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건축주에게는 전용률을 올리고,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며, 공사비를 아끼면서도 홍보하기에 좋은 상품의 특징은 남기는 개발사업 달인의 기본 덕목들 말고 바로 이런 건축가를 알아보는 눈과 정보가 필요하다.
 
처음 시행사에 다니면서 개발사업에서 만드는 그야말로 노골적인 자본주의 건축에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경험을 작은 매체들에 기고하기도 했다. 매해, 매분기마다 개발사업 건축에 대한 생각은 내 머릿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데 2025년 가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결론은 ‘팔릴 것으로 추정되어 착공이 이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시를 조금이라도 진보하게 하는 행간의 노력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익에만 천착하지 않고 매만졌던 요소들이 결국 이익을 남기는 길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이래저래 생각만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 회의에서는 공사비 캡9을 이야기하고, 시공사와의 회의에서는 “디자인을 위해 이 부분은 꼭 실행해야 된다”라고 말하는 앞뒤 안 맞는 캐릭터, 마치 얼마 전 AI와 대화 중 나를 정의 내렸던 단어 ‘회색지대 인플루언서’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참고

* 퍼시픽 플레이스의 리모델링 과정에서 인허가나 기술에 대한 과정은 원설계자인 웡앤오우양이 서포트 하였다.

 

1 국가나 지자체가 아닌 민간 시행사(Developer)가 자본을 투자해 진행하는 건축·부동산 개발사업.
2 필자는 까만색 캐드화면을 주로 보며 일하는 건축가로 10여년 정도 일하다 최근 약 4년간 하얀색 엑셀화면을 더 많이 보는 시행사에 재직중이다. 여성건축인매거진 SOFA-5 호 “사업관리본부 최차장의 근황” 인용
3 Value Engineering의 약자. 공사비 절감과 효율적 설계를 위해 적용하는 기법.
4 무엇이 도시의 얼굴을 만드는가 - 돈, 권력, 성, 노동, 전쟁, 문화로 읽는 도시 : 리처드 윌리엄스
5 국내에서는 규모에 따라 건축법상 근린생활시설이나 판매시설로 나뉘고, 대규모유통업법에서 대규모점포로 분류되기도 한다.
6 매력도시, 사람을 위한 건축이라는 주제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산적한 논제를 뒤로 하고 한국 건축가들에게 입면을 지루하게 하지 말라고 다그치고 있다. 담론을 주도하는 역량까지는 안되보이는데, 역동적 개발 도시에서 나를 애타게 찾아주는데 그걸 마다 하겠나 싶다. 
7 논슬립(Non-slip) 미끄럼 방지 기능이 있는 바닥재 마감
8 매스(Mass): 건축에서 건물의 덩어리감/형태감을 지칭하는 용어.
9 “여기까지가 최대”라는 공사비 상한선
최차장

최차장

최차장

건축사 최차장은 10년 동안 건축설계를 하며 건축주의 의도를 읽지 못해 혼란을 겪었다. 최근 4년 동안은 시행사에서 건축주 대변인으로 활동 중인데, 의도를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언젠가 본인의 프로젝트에 활용하고자 여러 도시와 지역을 돌아다니며 건물의 목적값 구현 과정을 상상하고, 그 해석 내용을 글로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