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여러 가지 단서로 온다. 어느새 두꺼운 옷들이 전진 배치된 옷장을 열어 단단하게 동여 입고 아침에 집을 나서면 얼음요새처럼 차갑게 솟은 빌딩들 사이로 시퍼런 하늘이 몰라보게 높아져 있다. 또 계절은 혓바닥으로 먼저 오고 간다. 그렇게나 시원하고 맛있던 메밀소바집 생각이 뚝 끊기면서 뜨끈한 국물만 찾게 되고 사거리 모퉁이에 등장한 붕어빵 트럭에 남몰래 눈도장을 찍는다. 언젠가부터 가을 탄다 어쩐다 아련한 폼을 잡을 새도 없이 거의 찍먹 수준으로 황급히 사라져 버리는 가을 끝자락에 벌써 초겨울 기운이 재빠르게 스몄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사람의 마음. 삼성전자가 몇 년을 두고 사만전자 오만전자를 면하지 못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비로소 십만전자가 되니 갑자기 좋아 보이고 빛나 보이고 나만 없는 것 같고 탐이 나는 이치인가. 왜 쉽사리 먹을 수 있을 땐 내내 나 몰라라 하다가 꼭 생태집 올라가는 비좁은 계단에 박 터지게 줄을 서는 겨울 문턱에 들어서야 얼큰한 생태찌개 한 사발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인가. 흔히들 말하기를 어쭙잖은 생태찌개는 가성비 좋은 동태찌개만 못하다고 하지만 「수정생태」는 지금의 여의도고등학교 맞은편으로 옮기기 전 수정아파트 상가 지하에 문을 열었던 1987년부터 소위 수십 년간 날렸던(?) 전통의 강호이자 개인적으로 신뢰해 마지않는 ‘자슐랭’(2세가 대를 이어 운영하는 맛집의 징표. 여의도 먹장금 「산삼골」편 참고) 맛집이다.
미나리가 수북히 올라가 있는 수정생태의 생태찌개 Ⓒ먹장금
일단 「수정생태」의 감동은 메인 디시인 찌개가 끓기도 전에 반찬만으로도 밥 한 공기를 뚝딱할 수 있는 밑반찬 오마카세의 향연이다. 입구에 놓인 <오늘의 반찬> 화이트보드에 계란찜, 계란튀김, 오뎅 볶음, 감자조림, 오이김치, 도토리묵무침, 직접 구운 김 등이 적혀 있다. 뭐 하나 빠짐없이 맛있는 찬 종류는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는데 무심한 듯 흘깃 훑어본 찰나에 풀치조림 같은 귀한 찬이 눈에 들어오면 내적 댄스 본능을 억누르며 침착해야 한다. 한 사람 앞에 한 접시씩 숭덩 퍼주는 보드라운 계란찜은 이 집의 시그니처 스타터로 왕돈까스 기사식당의 크림수프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그냥 김이라고 쓰지 않고 ‘직접 구운 김’이라고 쓰신 사장님의 자부심에는 이유가 있다. 실리카겔의 힘을 빌린 포장 김과는 차원이 다른 바삭하고 고소한 김을 맨밥에 얹어 먹으면 진짜 밥맛이 사악 도는데 너무 여러 번 접시를 비우긴 염치없으므로 자중하며 찌개가 끓기를 기다린다. 한 번은 인원이 많아서 녹두전과 낙지볶음까지 시도해 봤는데 역시나 수제비 잘하는 사람이 떡국도 잘한다고 주력 메뉴 외에도 굉장히 맛있다. 생태찌개를 머뭇거리는 사람과 동반해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맛집이다.
찌개가 끓기 전에 밥 한 공기 뚝딱 할 수 있는 반찬들. 날마다 다른 반찬이 나온다. Ⓒ먹장금
수정생태의 또다른 별미, 계란과 맛살을 깻잎으로 싸서 튀긴 계란 튀김. Ⓒ먹장금
입맛을 돋구는 빨간 양념의 낙지볶음. Ⓒ먹장금
이제 일주일 전부터 캐치테이블도 아닌 전화 예약의 공을 들였어도 실패하고 벼르다가 한가한 주말에야 이 집에 올 수 있었던 그 이유의 이유, 생태찌개의 시간이다. 알맞게 졸여낸 칼칼하고 맑고 진한 국물이 피어오르는 사이로 뽀둥한 명태살, 고소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알과 내장이 그득하다. 일행 중 국자를 잡은 사람이 배식 인원을 감안하여 마치 공정위에서 나온 듯 공평하고 엄정하게 두부, 생선 살코기, 곤이, 이리 등을 고루 담아준 걸 소중하게 받아 들고 먼저 국물 한 숟가락을 개시한다. 캬아~!!! 이 맛이지. 이렇게 뜨거운 국물을 시원하다고 맨 처음 표현한 언어 천재가 누구일까. 어제 먹은 햄버거와 감자튀김으로 꾸덕해진 위장까지 해장해 주는 느낌이다. 자제력 있는 현대 여성으로서 밥을 한 공기에서 멈추기 위해 초인적 인내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한 숟가락 뜨는 순간,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생태찌개. Ⓒ먹장금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요즘 들어 부쩍 예약하기 힘든 이유를 물었더니 얼마 전 모 그룹 김회장님이 다녀간 후로 더 소문이 난 탓이라고 사장님이 넌지시 알려준다. 캬아~ 필자가 재벌 회장님보다 은행 잔고는 조금(?) 딸려도 삼시 세끼 중 한 끼는 같은 걸 먹었구나 싶어 괜스레 뿌듯하다.
아침저녁으로 시시각각 바람이 서늘해지는 겨울 초입이다. 서울 자가든 전세든 대기업이든 그냥 회사든 어딘가에서 부지런히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김부장들의 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생태찌개 먹기 참 좋은 날씨다.
여의도 먹장금
"세상에 맛있는 것이 그리 많다는데 늦기 전에 제가 한 번 기미해보겠습니다."
수십 년 간 여의도 증권가에 적을 두고 삼시세끼를 꾸준히 실천해 왔으며, 재건축은 참아도 공복은 못 참는 여의도 구축 아파트 주민으로서 늙지 않는 식탐과 안전 노화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