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학생이던 시절에는 소위 ‘거장’이라 불리는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물들을 답사하며, ‘아 나도 언젠가 저 건축가들처럼 설계하기 위해 더욱 정진해야겠다.’며 혼자 가슴 벅차오르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땐 그랬다. 희미해지는 추억처럼, 나이가 들고 감성이 갈려 나가며 이제는 그런 감각이 다 무뎌진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점점 싸늘해져 감흥 없는 나의 마음을 그때처럼 또다시 왈랑거리게 하는 건축그룹이 있다.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 ⓒVincent Hecht
이들이 설계한 건물을 처음 본 건, 약 10년 전 도쿄의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이다. 사진으로 이런 미술관이 있다는 것을 먼저 보았을 때는 ‘N’처럼 보이는 이 건물은 어떤 단어를 직접적으로 형상화한 건가 싶었고, 외장재로 사용된 광택메탈 패널은 호쿠사이의 그림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였다. ‘설계자의 관심은 그저 자신의 고유한 형태 세계를 건축으로 변환하는 것1인 양, 기능이나 주변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고 자의적이군.’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방문했었다.
건축을 대할 때 사람마다 감상 포인트가 다른 것은 나에게 늘 흥미로운 주제다. 제일 뚜렷한 차이는 직관적으로 ‘좋다’라고 말하는 취향이 명확한 사람이 있고, 공간 구성의 논리와 생김새의 이유를 따져가며 ‘잘했다’라고 납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나는 후자에 가깝고 저 건물을 답사한 10년 전엔 논리적으로 납득을 시키는 건축만이 ‘올바른 건축’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기에, 건축가의 ‘자의성’으로 읽히는 부분에 더욱 거부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막상 호쿠사이 미술관에 직접 방문해서는, ‘좋음’과 ‘잘했음’, 다시 말해 ‘취향의 발견’과 ‘논리적 납득’이 다 충족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주변 경관과 함께 본 모습(좌)과, 건물 가운데를 관통하는 통로(우) ⓒ 최차장, 2017년
실제로 가보니 N처럼 생긴 입면은 네모반듯한 건물이 경관을 막지 않도록 1층에 통로를 만들고 형태를 비틀어 부담 없이 통과하고 드나들기 쉬운 공간을 만든 것이었다. 쨍한 금속 외장재는 지상철과 전깃줄이 혼재된 길과 주택가의 근린공원 사이, 다소 경관이 난잡한 위치에서 미술관으로 세련되게 어울리고자 선택한 것으로 읽혔다. 그리고 이유를 대기 어려운 ‘그냥 좋음’도 있었는지, 호쿠사이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낸 그날의 일기에는 이 공간과, 그것을 설계한 SANAA2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다시 만난 SANAA
작년 12월, 오사카의 우메키타 개발사업3을 살펴보고 왔다. 최근 자주 언급되는 개발사업이라 나까지 거들지 않아도 다들 알겠지만, 이 사업의 개발 방식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건물 모퉁이에 의무적인 마당을 할애하는 방식의 공개공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대형 공원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건물을 넣어버린 듯한 배치방식과, 그 중심의우메키타 파크4의 존재다.
우메키타 개발사업 전경 ⓒ www.nikken.co.jp
12월임에도 햇살이 따뜻해 잠시 우메키타 파크에 앉아 ‘좋음’과 ‘잘했음’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있으니, 도심 속 광장으로 나에게 익숙한 서울시청 앞이나 광화문 광장이 떠올랐다. 그것들 보다 더 좋다고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업무상의 이동을 위해 지나는 장소가 아니라 관광객 신분으로 여유롭게 머물고 있어 그럴 수도 있었겠다. 내 기분이 좋아서 다 좋아 보이는 상태인 점은 알겠고, 이 공간의 ‘잘했음’을 찾아보기로 했다. 입지에 초점을 맞춰보면, 우메키타 개발의 북측은 이 구역의 가장자리 성격이라 차량 통과가 적어, 차량 소음이 들리지 않는 것도 이 공간이 좋은 이유 중 하나다. 건널목의 신호가 바뀌는 순간, 거대한 도심 한가운데에서 잠시 적막해지는 순간이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다들 어딘가를 향해 평화롭게 앉아있는 것인데, 로토하트 스퀘어(Rhoto heart square)5를 향해서다. 거대 복합 개발 사업지 내에 비교적 작은 덩치의 이 지붕이자 건축물 역시 오늘의 주인공 SANAA가 설계하였다.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타워들 사이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혼자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으로 이 공원의 상징이 되는 공간이다. 이건 정말 잘했… 아니다. 좋은 건가? 더 생각해 보자.
로토하트 스퀘어를 향한 계단식 좌석(좌)과 앉으면 보이는 장면(우) ⓒ www.ggnltd.com
볼수록 매력적인, 구원을 안겨준 듯한 이 형상은 분명 '좋다'에 가깝다. 가성비를 따지며 짜게 굴지 않은 아름다운 건물과 함께 비싼 도심의 공간을 누구에게나 여유 있게 내어주고 있었고, 오래 머물러도 눈치 보이지 않는 근사한 공간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기단이 없이 만들어진 로토하트 스퀘어 ⓒ최차장
공원 안에 이런 캐노피 형태를 만들 때 흔히 따라오는 감각은 기단이나 무대를 만들어 그 위에 지붕을 얹어 놓아야만 할 것 같은 무언의 공식이다. 문화 행사를 열어야 할 것만 같은 콘텐츠 유치의 압박일수도 있고, ‘야외무대’라는 명칭을 붙여야 계획이 마무리되는 듯한 관성이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은 바닥에 별도의 무대나 기단을 만들지 않고 그늘 밑에서 쉬거나, 그냥 통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공원의 바닥과 단차 없이 이어져 접근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모두를 위한 배리어프리 느낌이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 그늘에서 족욕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야외에서 족욕기에 발을 담그고 멍때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만약 무대 위였다면 이 프로그램은 자연스럽게 운영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로토하트 스퀘어 ⓒ최차장
바닥이나 오르는 계단이 없으니 정해진 방향성도 없다. 관행적 건축 교육이나, 건축인허가에서 도면을 그릴때 정-배-좌-우의 4면을 그리게 되어있다. 두 가지 모두를 오래 경험한 나로서는 어떤 건물을 보면 이 양반은 정면이 어디신가…? 생각부터 하게 되는데, 이 건물은 그 질문에서 자유롭다. 건물의 위풍당당한 정면을 보면 위압이 느껴져 옆구리부터 찾는 나로서는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는 이 건물의 ‘정면 없음’에서 오히려 환대를 느끼게 된다.
족욕프로그램 진행 중(좌), 실내외 지붕 두께가 같다(중), 지붕너머로 보이는 우메다스카이타워 (우) ⓒ최차장
일본과 우리나라의 단열 기준이 다르므로6, 캐노피가 실내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에도 외부와 지붕의 두께 변화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그 연속성은 한국 건축 환경에 놓인 내게 특히 아름답게 보인다. 오사카의 아이콘 우메다 스카이타워를 향해 열린 듯한 곡선의 지붕도 세련된 유머처럼 보인다.
건물이 있는데, 없습니다.
SANAA가 만드는 건물들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그녀의 건축 철학이 일목요연하게 출판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아쉽다.7(한편으론 본업으로 언행일치를 하기는 힘들 수 있기 때문에 잘하고 있는 것일 수도) 인터뷰나 건축영화제에서 본 다큐 영상 등을 통해 그녀의 생각을 들여다볼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그녀의 설계 방식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주변과의 ‘연결’, ‘대지와의 호응’이다.8 연결과 대지와의 호응을 고려하지 않는 건축가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 단어를 공간에 적용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오사카예술대학 아트사이언스 학과동 ⓒ Vincent Hecht
오사카에 간 김에 오사카 예술대학9에도 SANAA가 설계한 건물 이 있어서 찾아가 보았다. 여기에서도 그들은 ‘연결’과 ‘대지와의 호응’을 자신들만의 치열함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 얇은 슬라브와 한 손에 잡힐 듯한 기둥, 맑은 유리 - 마치 ‘건물이 있는데요? 없습니다.’라는 농담처럼, 건물 안에 들어갔는데 건물이 느껴지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이들은 ‘대지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 투명하고 가벼운 건물을 실험하는 데 몰입해 있구나.’ 더 샅샅이 살펴보며 감동을 느끼고 싶었으나 오사카 예술대학의 건물 관리자께서 나가달라고 하셨다. (캠퍼스 건물이 개방된 줄 알았습니다. 스미마셍)
다들 잘한다, 그다음은?
재작년 많은 사람을 도쿄로 향하게 했던 아자부다이 힐즈, 최근 도쿄만에 오픈한 다카나와 게이트웨이 개발 등을 실제로 찾아가서 보면 미디어에서 접했던 것보다 더 잘했다. 국내 건축도 마찬가지인데, '이거 사진만 멋지네'라는 소리가 나오던 공간 경험의 불만족 시대는 어느덧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자본의 성장, 기술과 레퍼런스가 쌓여 이제 웰메이드 개발사업은 당연한 기준이 됐다. 다들 잘한다.
그 다음 수순은 랜드마크였다. 이왕 도시의 요지에 대규모 자본을 쏟는 거, 스타 건축가와 손잡고 오브제 하나를 꽂아보자. 프리츠커상과 RIBA 골드메달10 수상자의 이름은 그 자체로 브랜드 가치이자 장소성이 된다. 우메키타가 안도 다다오와 세지마를 핵심 시설 의 설계자로 기용한 것도 그 흐름 위에 있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뭘까? 웰메이드를 넘어 유명 건축가의 이름값도 이미 하나의 공식이 되어가고 있다면, 다음 질문은 필연적으로 떠오른다. 이름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논리로 설명하기 전에 '좋다'고 느껴지는 감성과 예술성이 개발사업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아직 뚜렷한 답을 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로토하트스퀘어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그날의 느낌이, 방향의 힌트처럼 떠오른다.
달라지고 있는 협업의 풍경
유명 건축가를 기용하는 협업 방식은 한동안 사대주의 소리를 듣기도 했다. 개발사업 건축주 입장에서 타산은 맞았을 것이다. 프로젝트 인지도 상승, 방문 유인, 그리고 실제로 와서도 오래 머물고 싶은 이유가 되었으니, 통상적인 설계비 범위를 넘더라도 감당 가능한 수준일 것이다.
작년에 어느 기업과 협업 중인 해외 건축가의 설계비를 풍문으로 듣고 입이 떡 벌어졌던 일이 있다. 국내 총괄 건축사무소를 별도로 두고 거기에 추가로 집행한 금액이라 더 놀랐다. 예전처럼 홍보 효과를 위해 컨셉 설계만 맡기고 이름을 취하는 방식은 이제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요즘 국내와 협업하는 해외 설계사무소들은 디자인 구체화 과정부터 실시설계 리뷰, 시공 후 의도 구현 감리까지 관여하는 방식으로 계약한다. 비용이 오르는 만큼 건축가의 의도가 끝까지 지켜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건축주의 설계 권력이 과도해지는 것을 견제하는 시장이 생기는 셈이라 긍정적으로 보이면서도, 국내 건축가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협의 조건들이 해외 건축가에게는 수용되는 장면을 마주할 때면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협업하는 해외 건축사무소를 살펴보면 그 안에 한국 건축가들도 꽤 많은데,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시니어 디자이너로 내재화되어 있다. 예전처럼 국내 법규를 무시한 채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느낌이 아니라, 이제는 국내 법규를 잘 이해하고(어떨 때는 나보다 더), 가성비까지 고려하는 현실적인 협업자가 되어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건축주의 의도를 해외 설계사에 체계적으로 전달하고, 그들의 디자인 의도를 살리며 국내화하는 것에 특화되는 국내 건축사무소들의 시장도 체감한다. 전통적인 설계 영역은 줄어들지만, 복잡한 구도의 설계팀을 리드하는 역할에 수요도 생기고 있다.
다음 버전을 만들고, 기다리며
얼마 전 만난, 국내 유명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친구가 발주처와 시공사 때문에 의도한 디자인을 구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투덜댔다. 내가 보기엔 국내 어느 곳보다 건축가의 자의적 디자인으로 시그니처를 쌓아가는 사무소인데, 거기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게 흥미로웠다.
SANAA 작품집의 몇 자 안 되는 글들을 살펴보면서도 비슷한 뉘앙스를 접했다. 그들은 모더니즘도, 해체주의도, 브루탈리즘도 아닌 자신만의 실험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들 역시 산업이 고도화되고 관계자가 많아질수록 건물을 끝까지 의도대로 지켜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선 하나를 스윽 긋는 것만으로 건물이 완성되는 것처럼 보였던 그들에게도, 발주처가 디자인의 향방을 흔드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좋음'이 느껴지는 건축이 개발사업의 언어가 되기까지, 아직 넘어야 할 수싸움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SANAA도, 내 친구도, 나도 -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싸움을 하고 있다. 마침 2030년을 전후해 서울 곳곳에서 그 도전들이 펼쳐지고 있다. 수많은 손들이 이 도시를 빚어가는 동안 어떤 모습이 만들어질지 궁금하다. 그 장면들을, 관전자로서 동시에 플레이어 중 한 사람으로서, 초롱초롱하게 지켜보려고 한다. 여전히 설레면서.
[1] <건축; 형태를 말하다 – 라파엘 모네오 바예스> 프랑크게리의 건축 중 [2] 세지마 가즈요(妹島和世)와 니시자와 류에(西沢立衛)가 1995년 설립한 일본의 건축그룹. 2010년 두 사람 모두 프리츠커상을 받았으며, 얇은 슬라브와 투명한 유리, 경계를 지우는 설계 방식으로 독자적인 건축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3] 2027년 전체 완공 예정인, JR 오사카역 북측 옛 화물역 부지를 업무·상업·주거·공원 기능이 결합된 복합도심으로 전환하는 오사카 핵심 도시재생 프로젝트. https://umekita.com/ [4] 우메키타 2단계 개발의 중심에 있는 녹지 광장 [5] Rohto Heart Square. 일본 제약회사 로토제약(ロート製薬)이 후원한 우메키타 파크 내 대형 캐노피 시설로, SANAA가 설계했다. 공원 바닥과 단차 없이 이어지는 개방형 구조가 특징이다. [6] 한국은 외벽·지붕 등 부위별 열관류율을 직접 규정하는 반면, 일본은 주택 전체의 외피 성능을 기준으로 보되 사양 기준에서는 단열재의 종류·두께·열저항(R)을 함께 확인하는 방식을 쓴다. [7] SANAA의 30년 활동을 정리한 작품집(1987~2021, 전3권)은 있으나, 인터뷰나 강연 기록 외의 세지마가 자신의 건축 철학을 직접 서술한 단행본은 찾기 어렵다. 파트너 니시자와 류에의 저서 《니시자와 류에가 말하는 열린 건축》(2016)이 국내에 번역 출판되어 있다. [8] https://umekita.com/midori/features/as01 [9] 오사카예술대학 아트사이언스 학과동, https://www.osaka-geidai.ac.jp/guide/access/campus [10] 프리츠커상은 1979년 제정된 건축계 최고 권위의 국제상(‘건축계의 노벨상’)으로 건축적 성취와 사회적 기여를 평가하며, RIBA 로열 골드 메달은 1848년부터 영국왕실 후원으로 수여되는 상으로 건축 분야에서 평생에 걸친 국제적 영향력을 인정하는 최고 권위의 상이다
최차장
최차장
건축사 최차장은 10년 동안 건축설계를 하며 건축주의 의도를 읽지 못해 혼란을 겪었다. 최근 4년 동안은 시행사에서 건축주 대변인으로 활동 중인데, 의도를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언젠가 본인의 프로젝트에 활용하고자 여러 도시와 지역을 돌아다니며 건물의 목적값 구현 과정을 상상하고, 그 해석 내용을 글로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