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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은 골드만삭스를 12년간 이끈 로이드 블랭크파인의 《Streetwise》, 한국어판 제목으로는 《생존 지능》입니다. 650페이지에 달하는 그야말로 벽돌책이지만 막상 펼치면 앉은 자리에서 읽을 만큼 재미있습니다.
브루클린의 공공주택에서 자란 소년이 하버드를 거쳐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더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그가 그 여정에서 무엇을 붙잡고 살아남았는가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월가, 책상 위의 지식만으로는 도무지 승부가 나지 않는 그 세계에서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무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책 제목이 바로 그 답입니다. ‘Streetwise’, 바로 거리에서 배운 지혜입니다. 휴가철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책을 다 읽고 나면 투자와 리더십, 그리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믿고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 꽤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잃는 이유
투자의 세계에는 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세상의 방향을 정확히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투자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 그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2024년 오픈AI를 떠난 젊은 연구자 레오폴드 아셴브레너(Leopold Aschenbrenner)입니다. 그는 오픈AI를 나온 뒤 《Situational Awareness : The Decade Ahead》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해 AI가 앞으로 산업과 국가 경쟁력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대담하게 전망했습니다. 글은 실리콘밸리에서 큰 화제가 됐고 그는 자신의 전망을 실제 투자로 옮겼습니다. 자신이 쓴 글과 같은 이름의 헤지펀드 ‘Situational Awareness’를 설립해 AI 인프라와 반도체 등 AI 시대의 수혜 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판단이 놀라울 정도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올해 6월까지 펀드는 엄청난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7월 들어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AI 관련 주식들이 급락하면서 펀드 포트폴리오 가치는 한 달 만에 67% 떨어졌고 레버리지는 손실을 더욱 키웠습니다. 결국 펀드는 공개주식 포트폴리오 대부분을 정리했고 레버리지도 제거했습니다. 아셴브레너는 투자자들에게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보다 영구적인 자본 손실에 훨씬 가까이 갔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생각이 반드시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AI가 엄청난 컴퓨팅 파워와 인프라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전망도, AI 인프라가 앞으로 거대한 산업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7월의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펀드는 당시 기준 올해 들어 여전히 상당한 수익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순간에 생존 자체가 위협받았습니다. 방향을 맞히는 것과 투자에서 살아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8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1998년 존 메리웨더가 창업하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두 명을 포함한 금융공학의 최고 두뇌들이 참여했던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는 정교한 수학적 모델을 통해 시장의 작은 가격 차이를 수익으로 바꿨습니다. 오랫동안 그 전략은 놀라울 정도로 잘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시장이 모델의 예상 범위를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하자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것으로 가정했던 자산들이 동시에 움직였고 막대한 레버리지는 수익을 만드는 도구에서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LTCM의 위기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 전체를 위협할 정도로 커졌고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중재 아래 월가 금융회사들이 구제에 나서야 했습니다.
하나는 금융공학의 시대이고, 다른 하나는 AI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두 사건이 던지는 질문은 놀랄 만큼 비슷합니다. 세상의 방향을 정확히 분석하고 최고의 모델을 가지고 있어도 왜 투자에서는 실패할 수 있을까?
최근 국내 증시에서도 이 오래된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코스피는 7월 말 극심한 변동성을 보였습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두 종목을 추종하는 단일 종목 레버리지 ETF에 거래가 집중되면서 시장의 쏠림도 커졌습니다. 레버리지 ETF는 하루의 수익률을 기준으로 목표 배율을 추종합니다. 방향을 정확히 맞히면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지만 변동성이 커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될수록 이른바 ‘변동성 끌림(volatility drag)’이 발생하고 목표 배율을 유지하기 위한 포지션 재조정 역시 시장의 쏠림이 심한 상황에서는 변동성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며칠 뒤 시장은 기록적인 반등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급락과 급등을 모두 경험한 투자자들에게 남은 것은 단순히 방향을 맞혔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방향을 맞히더라도 그 과정의 변동성을 견디지 못하면 투자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최근 시장의 급격한 변동을 레버리지 ETF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반도체 업황에 대한 기대와 우려, 글로벌 자금 흐름, 지정학적 위험과 시장 유동성 등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상품이나 모델 자체가 아닙니다. 모델이 설명할 수 있는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부터 위험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질문에 골드만삭스를 12년간 이끈 한 사람의 이야기가 조금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하버드가 아니라 ‘거리’에서 배운 것
로이드 블랭크파인의 자서전 《Streetwise》는 이 질문에 흥미로운 답을 주는 책입니다. 브루클린의 공공주택에서 자라 하버드를 거쳐 월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가 화려한 학벌이나 정교한 이론만이 아니라 ‘길거리의 지혜(Streetwise)’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거리는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고 브루클린의 거친 동네에서 다양한 사람을 상대하며 몸으로 익힌 감각입니다. 누가 진짜를 말하고 누가 허풍을 떠는지, 상황이 언제 틀어지기 시작하는지, 위협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읽어내는 촉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기준으로 사람을 재단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시선 역시 거리에서 얻은 자산이었습니다. 책의 첫 장 ‘Advantages’에서 그는 사람들이 가득한 방에 들어설 때 자신이 기득권의 일원인지, 아니면 여전히 브루클린에서 온 아이인지를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골드만삭스의 CEO가 되었는데도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브루클린의 아이가 남아 있었던 셈입니다. 어쩌면 이 아웃사이더의 시선이 그에게는 중요한 경쟁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엘리트 조직의 관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직함이나 배경보다 사람 자체를 보고,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볼 때 한 번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시선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감각을 지식의 반대편에 놓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골드만삭스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와 경제학자, 트레이더들이 모여 있는 조직입니다. 블랭크파인은 그들의 모델과 전문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숫자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경계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숫자가 말해주는 것과 숫자가 말해주지 못하는 것을 함께 보는 능력. 어쩌면 그것이 그가 말하는 Streetwise에 가장 가까운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법률가에서 트레이더로, 기회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거리의 감각이 이론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은 그가 골드만삭스의 중심으로 들어가기까지의 우회로입니다. 브루클린 공공주택 출신의 그에게 하버드 입학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이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은 그 순간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고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뒤 세법 변호사가 됐지만 안정적인 변호사 생활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실시간 승부’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982년 28세의 나이에 그는 하버드 로스쿨 출신 변호사라는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약간의 감봉까지 감수하며 원자재 유통회사인 제이 애론(J. Aron)에 금을 사고 파는 세일즈맨으로 들어갑니다. 공교롭게도 제이 애론은 골드만삭스에 막 인수된 상태였습니다. 한때 골드만삭스에 지원했다 탈락한 경험이 있던 그였기에 정작 원하던 문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결국 옆문으로 그 안에 들어와 있었던 셈입니다. 고액 연봉과 정해진 미래를 버리고 금 세일즈맨이 된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의 반응은 짧고 강렬했습니다.
“이러려고 하버드를 갔니?(FOR THIS YOU WENT TO HARVARD?)”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그의 인생을 바꿉니다. 정공법이 아닌 우회로로 골드만삭스에 들어간 그는 트레이딩 현장에서 가격이라는 숫자 뒤에서 움직이는 공포와 탐욕, 시장의 사이클을 몸으로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의 커리어에서 첫 번째 중요한 기회가 찾아옵니다. 이슬람 율법상 이자를 받을 수 없는 사우디 고객을 위한 거래였습니다. 블랭크파인은 하버드 로스쿨에서 배운 세법 지식과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를 결합해 새로운 거래 구조를 설계했습니다. 약 1억 달러 규모의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거래였습니다. 이 거래를 성사시키려면 제이 애론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골드만삭스의 다른 부문과 협업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블랭크파인은 당시 골드만삭스의 핵심 인물이었던 로버트 루빈과 연결됩니다.
이 대목이 참 재미있습니다. 변호사를 그만두고 세일즈맨이 됐지만 버렸다고 생각했던 법률 지식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다시 쓰였습니다. 법률 지식과 영업 현장에서 얻은 고객에 대한 이해가 하나의 거래로 연결됐고 그 거래가 다시 중요한 사람과의 인연으로 이어졌습니다. 경력은 때로 직선으로 쌓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관없어 보였던 경험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면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뒤 제이 애론 자체에 큰 변화가 찾아옵니다. 사실 골드만삭스의 제이 애론 인수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두 조직의 문화와 시스템은 좀처럼 섞이지 못했고 골드만삭스는 사실상 합병에 실패한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골드만삭스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술을 맡긴 인물이 네덜란드 출신 파트너 마크 윙클먼(Mark Winkelman)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애초에 이 합병 자체를 반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문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그 문제를 고칠 적임자로 지목된 셈입니다. 윙클먼은 기존의 원자재 거래 중심 조직을 정량 분석과 리스크 관리에 기반한 조직으로 재편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인재들을 영입하고 외환 등 새로운 영역을 확대하면서 제이 애론을 보다 기술적이고 체계적인 조직으로 바꿔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윙클먼의 눈에 블랭크파인이 들어옵니다. 블랭크파인은 트레이더가 아니라 세일즈맨이었습니다. 하지만 윙클먼은 기존의 직무나 경력만으로 그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블랭크파인에게 외환 세일즈 조직을 맡겼고 이후에는 외환 트레이딩까지 책임지는 자리로 발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로버트 루빈이 이 인사에 반대했다는 점입니다. 세일즈 출신에게 트레이딩 조직을 맡기는 것은 당시 골드만삭스의 관행으로는 파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윙클먼은 자신의 판단을 밀어붙였습니다. 이 대목은 앞의 사우디 고객과의 거래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흥미롭습니다. 윙클먼은 제이 애론을 과거의 경험과 감에 의존하는 조직에서 정량 분석과 데이터, 리스크 관리에 기반한 조직으로 바꾸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을 발탁할 때는 기존의 공식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데이터와 모델을 누구보다 중시하면서도 데이터만으로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한 사람의 가능성을 알아본 것입니다.
돌아보면 블랭크파인의 커리어는 이런 장면들의 연속입니다. 법률 지식이 사우디 고객과의 거래에서 쓰이고, 그 거래가 로버트 루빈과의 인연을 만들고, 세일즈 현장에서 보여준 능력이 윙클먼의 눈에 띄어 트레이딩을 이끄는 기회로 이어졌습니다. 하나의 경험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이 다시 다음 기회를 연결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가 정식으로 파트너가 되기 전부터 이미 이렇게 행동했다는 점입니다. ‘파트너가 되다’ 장에서 그는 조직도상의 서열이 모호할 때는 자기가 책임자인 것처럼 행동해 보라고 조언합니다. 사람들이 따라오면 좋은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어깨 한번 으쓱하고 제 갈 길을 가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대개 직함보다는 리더십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에게 반응하기 마련”이라는 그의 말대로 윙클먼이 알아본 것도 결국 직함이 아니라 이미 리더처럼 움직이고 있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인생은 결국 ‘누구를 만나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네트워크는 단순히 많은 사람을 아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상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신뢰를 쌓았을 때 다음 기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둘째, 팀을 짤 때는 사람을 읽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골드만삭스는 똑똑하고 공격적이며 경쟁심 강한 인재들의 집합체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모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그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블랭크파인의 강점은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를 읽고 서로 다른 능력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내는 데 있었습니다. 셋째, 영업은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그가 골드만삭스 제국에 들어간 첫 직함은 임원도 애널리스트도 아닌 세일즈맨이었습니다. 상품을 직접 팔아본 사람은 시장의 반대편을 보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팔고 싶은지가 아니라 고객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우디 고객과의 거래도 결국 여기에서 시작됐습니다. 고객이 처한 제약을 이해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법률 지식과 금융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뢰입니다. 금융에서 거래는 숫자로 체결되지만 그 숫자에 서명하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상품과 뛰어난 모델이 있어도 상대가 나를 믿지 않는다면 거래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좋은 네트워크 역시 연락처의 숫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네트워크는 오랫동안 사람과 일하며 쌓아온 신뢰의 결과입니다.
 

 블랭크파인이 거리에서 가져온 세 가지 무기
블랭크라인이 거리에서 가져온 세 가지 무기는 첫째, '겸손'입니다. 블랭크파인은 금융공학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가장 정교한 금융회사 가운데 하나에서 성장했고 기술과 정량 분석, 리스크 모델이 트레이딩 조직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습니다. 모델을 믿되 모델을 현실과 혼동하지 않는 것. 모델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패턴을 발견하게 해주고 복잡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모든 모델은 일정한 가정 위에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시장은 때때로 그 가정을 깨뜨립니다. 거리에서는 예상이 틀렸을 때 즉시 대가를 치릅니다.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모델이 틀렸을 때가 아니라 모델이 너무 오랫동안 맞아서 우리가 틀릴 가능성을 잊어버렸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그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원칙은 ‘틀렸다’와 ‘멍청했다’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결정이 나중에 잘못된 결과로 이어졌다고 해서 그 결정을 내린 사람이 어리석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만이 아니라 그 판단을 내리던 순간 무엇을 알 수 있었고 당시의 정보 안에서 얼마나 합리적으로 판단했는가입니다. 결과론으로 사람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조직 안의 누구도 위험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판단하거나 보고하려 하지 않게 됩니다. 블랭크파인이 헨리 폴슨을 두고 문제를 이해하려는 뛰어난 경청자였다고 회고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답을 미리 정해놓고 듣는 사람과 문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판단을 진짜로 신뢰하는 사람은 결국 전혀 다른 조직을 만듭니다. 겸손은 단순한 성격의 미덕이 아니라 판단의 오류를 줄이는 하나의 방식인 셈입니다.
둘째, '현장감'입니다. 가격은 숫자로 나타나지만 그 숫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늘 사람이 있습니다. 투자자의 공포와 탐욕, 경쟁자의 행동, 고객의 욕망, 조직 내부의 이해관계는 엑셀 한 칸에 완전히 담기지 않습니다. 블랭크파인은 숫자를 보되 숫자만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주 월요일 관리자들과 만나 문제를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 자리를 가졌고 특정 부서의 하루 손익이 유난히 크게 움직였다 싶으면 리포트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숫자가 이상하면 숫자를 더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가 만들어진 현장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누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어떤 가정이 있었는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숫자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맥락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블랭크파인이 브루클린의 거리에서 익힌 사람을 읽는 감각도 이런 습관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객을 만날 때도, 트레이딩 데스크에서도, CEO가 된 뒤에도 그는 문제에서 멀리 떨어진 보고서만으로 판단하기보다 문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습니다. 좋은 판단은 결국 더 많은 숫자를 보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숫자 뒤에 있는 사람과 상황을 얼마나 가까이에서 확인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셋째, '대비'입니다. 블랭크파인이 생각한 리스크 관리의 중요한 원칙도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리스크 관리의 목적은 미래를 정확히 맞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충분히 다양한 가능성을 상정하고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을 때 남들보다 빨리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골드만삭스가 위기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도 모든 위기를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라기보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검토하고 위험을 관리했기 때문입니다. 블랭크파인은 투자 담당자와 리스크 담당자의 의견이 충돌할 경우 대체로 리스크 담당자의 손을 들어줬다고 회고합니다.
수익을 놓치면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 있지만 한 번의 잘못된 베팅으로 생존 자체가 위협받으면 다음 기회는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아셴브레너가 떠오릅니다. 그의 AI에 대한 장기 전망은 결국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투자에서는 내가 결국 맞을 것인가만큼이나 내가 맞는 것으로 판명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좋은 모델은 미래를 대신 예언해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여러 가능성을 미리 생각하게 하고, 예상과 다른 상황이 왔을 때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하는 도구에 가깝습니다. 미래를 맞히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도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Streetwise》를 읽으며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됩니다. 기술은 변하고 상품은 변하고 시장의 이름도 변합니다. 하지만 거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공포가 전염되는 속도, 위기가 지나간 뒤 다시 위험을 잊어버리는 인간의 모습은 놀랄 만큼 반복됩니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과거의 가격을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왔는지를 공부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란 어쩌면 가장 오래 축적된 시장 데이터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의 Streetwise가 조직의 판단력이 되는 순간
블랭크파인의 Streetwise가 진정한 힘을 발휘한 것은 개인의 감각에 머무르지 않고 골드만삭스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파트너십(Partnership) 문화 안에서 집단의 판단 능력으로 전환됐기 때문입니다. 파트너십의 중요한 전제는 혼자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트레이더라도 다른 사람이 보는 위험을 듣고 자신의 판단이 틀릴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내가 틀릴 수 있다.”

이 짧은 문장은 금융회사에서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한 사람의 확신보다 여러 사람의 서로 다른 판단을 검증하고 문제가 생기면 빠르게 포지션을 바꾸는 조직이 결국 오래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겸손과 현장감, 대비 역시 개인의 습관에 머물 때보다 조직의 문화가 되었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틀린 판단을 결과론으로 비난하지 않는 문화가 있어야 사람들이 위험을 솔직하게 보고할 수 있습니다. 문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말을 듣는 문화가 있어야 숫자 뒤의 맥락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맞히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을 우선하는 문화가 있어야 호황기에도 리스크를 경계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월가의 천재들에게도 거리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인지 모릅니다. 그들이 덜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뛰어난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과 성과에 갇히지 않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인정하며 개인보다 조직 전체의 이해를 선택하게 만드는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에서도 골드만삭스를 지탱한 것은 어떤 하나의 모델이나 천재적인 판단만이 아니었습니다. 빠른 리스크 축소와 헤지, 자본 확충 같은 구체적인 금융적 대응과 함께 서로 다른 판단을 검증하고 상황 변화에 대응하는 조직의 능력이 작동했습니다. 물론 《Streetwise》는 골드만삭스를 이끈 당사자가 쓴 회고록입니다. 골드만삭스의 모든 판단이 옳았던 것도 아니고 금융위기 이후 회사가 받은 비판이나 평판의 훼손까지 파트너십 문화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이 책은 흥미롭습니다. 완벽해서 살아남은 조직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수하고 비판받고 위기를 겪으면서도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수정하고, 어떻게 다시 움직였는가를 한 내부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시스템 역시 숫자만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사라지는 순간 가장 좋은 자산도 거래되지 않고 신뢰가 회복되는 순간 시장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Streetwise의 핵심은 ‘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정보를 모으고, 모델을 만들고, 사람을 만나고, 서로 다른 판단을 듣고, 그 모든 것을 바탕으로 결정하되 언제든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틀렸을 때는 빠르게 인정하고, 현장으로 돌아가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확인하고, 다음 선택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거리에서 배우는 가장 오래된 리스크 관리인지도 모릅니다.
 

서재를 덮으며
1998년 LTCM의 파국에서 2026년 아셴브레너의 아찔한 한 달까지. 시장을 움직이는 기술은 놀라울 만큼 달라졌습니다. 금융공학의 시대를 지나 이제 우리는 AI의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Streetwise》를 덮으며 오히려 반대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투자의 도구는 끊임없이 바뀌지만 투자에 필요한 본질적인 자산은 생각보다 오래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보가 있어야 시장을 볼 수 있습니다. 모델이 있어야 흩어진 정보를 구조화하고 인간의 직관만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운 패턴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네트워크가 있어야 혼자서는 얻을 수 없는 정보와 다른 관점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뢰가 있어야 사람과 자본이 실제로 움직입니다.
네트워크와 신뢰도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좋은 네트워크란 결국 오랜 시간 사람과 거래하며 축적한 신뢰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정보, 네트워크, 신뢰, 그리고 모델. 예나 지금이나 투자란 결국 이 네 가지를 얼마나 잘 축적하고 연결하느냐의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AI가 이 네 가지를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과거의 Streetwise가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축적한 판단력이었다면 AI 시대에는 방대한 정보와 거래의 역사, 사람과 자본의 관계를 연결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패턴을 발견하고 여러 가능성을 미리 구조화하는 새로운 종류의 Streetwise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SPI가 만들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투자 판단의 기반입니다. 더 많은 정보를 보여주는 데이터베이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정보와 시장의 네트워크, 오랫동안 축적된 신뢰, 그리고 데이터를 해석하는 모델을 연결해 투자자가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AI와 모델도 마지막 판단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델이 정교해질수록 사람에게 더 필요한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 숫자 뒤의 맥락을 직접 확인하는 현장감, 그리고 미래를 맞히기보다 여러 가능성에 대비하는 태도입니다. 아셴브레너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도 어쩌면 그것입니다. 미래를 맞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미래가 올 때까지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Streetwise》가 남기는 메시지는 의외로 오래된 동시에 아주 현대적입니다. 숫자를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끝까지 의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AI와 정교한 모델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월가의 천재들이 여전히 거리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김정은

김정은

SPI 대표

2018년부터 SPI(서울프라퍼티인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SPI는 상업용부동산의 투명하고 올바른 정보와 데이터를 제공하는 전문 플랫폼으로, 깊이가 다른 상업용 부동산 아티클과 시장에 특화된 데이터 리서치 및 애널리틱스를 기반으로 출판, 교육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여 사람과 비즈니스를 연결합니다. 더 나아가 시장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가 사는 도시를 더 좋게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