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건물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수정이 있을까요? 그 과정에서 건축가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건축주에게 신뢰를 전하는 것부터 자산의 목적을 만들어 주는 일까지 다양하기도 하죠. 건축 언어를 이해시키는 부분도 건축가의 몫입니다. 이런 과정을 몸소 경험한 건축가의 시선으로 건축물을 살펴보면 어떤 차이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건축물은 각기 다른 목적값, 일반어로 컨셉을 어떻게 구현했을까요? 최차장이 건물을 답사하며 건축가의 언어를 해석합니다. “저는 현재 자본주의 건축의 목적값을 대변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작가만의 앵글을 통해 건축물의 ‘수익적’ 가치뿐 아니라 ‘존재’적 가치에 대해서도 상기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론 머스크가 화성에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가를 찾는다면, 누가 그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될까?” 한 달에 한 번 정성을 다해 도시 건축을 주제로 수다 타임을 갖는 탐구 스튜디오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다. “아무래도 노먼 포스터가 수주하지 않겠어?” 봄도시건축 김소장의 답이었다. 노먼 포스터가 수장으로 있는 포스터 앤 파트너스는 설계비와 공사비를 풍부하게 가진 건축주가 만날 수 있는 지구 최강 건축 회사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디자인과 시공 품질이 완성도 높게 구현된 사례가 많아 해외 도시를 방문하기 전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건물이 있다면, 일단 지도 앱에 저장해두곤 한다. 지난 5월, 홍콩 방문 때도 그랬다.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홍콩 랜드마크 건축물
노먼 포스터의 설계로 홍콩에 지어진 건물 중 대표는 센트럴에 있는 홍콩상하이은행(HSBC) 본사이다. 건축물의 풍수(風水)지리를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건축물의 생김새보다 뒷배경이 관심을 받는 것이 흥미로운데, 건물 혹은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기운을 막는 건물을 짓네 마네 하다가 건물을 땅 위로 띄워버리면 되지 않나’라는 썰을 들어봤을 것이다. 썰이 아니라 실화였다. 이 건물은 지면에 박힌 건축이 기운의 흐름을 막지 않도록, 건물을 통째로 들어 올려 지면 위로 띄운다는 다소 ‘만화적인 발상’을 실제로 구현했다.

1979년, 노먼 포스터가 설계하고 1986년 준공된 홍콩상하이은행(HSBC) 본관 ⓒ 포스터 앤 파트너스 홈페이지

1층 정면에서 바라본 홍콩상하이은행 본관 건물 ⓒ최차장
달나라도 오가는 시대에 건물을 띄우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냐고 반문할 이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건물은 보통 땅속 기초부터 시작해서 밑에서 위로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홍콩상하이은행 건물은 무거운 상부 구조물을 공중에 띄워놓고 그 아래를 비워둔 형태다. 이런 식으로 자연의 원칙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당연히 공사비가 많이 든다. 최근 구조 공사비를 최소화하는 문제로 시달렸던 실무자 입장에서 이런 건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그만큼 대단한 거다.

홍콩상하이은행 건물의 구조를 3차원으로 보여주는 그림 ⓒ포스터 앤 파트너스 홈페이지
홍콩상하이은행 건물은 지면에 맞닿는 부분을 비우기 위해 그림처럼 멀찍이 두 개의 수직 구조를 만든 다음, 바닥 판을 위에서부터 매다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입이 떡 벌어지는 구조를 가능하게 한 건축가의 아이디어와 건축주의 예산 집행 결단이 놀랍기만 한데, 아닌 게 아니라 1985년 준공 때부터 한동안 가장 비싼 건물로 회자되었다. (52억 HKD. 1985년 환율 기준 약 5,800억 원. 평당 2천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풍수이론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
그럼 이 시점에서 이렇게 건축주에게 엄청난 돈을 쓰게 만든 풍수가 그렇게 중요한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풍수와 관련해서는 나 역시 경험이 있다. ‘포스터 형님 저도 그 마음 알죠.’라며 노먼 포스터의 어깨에 손가락 하나를 살짝 걸치고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2018년 어느 기업 사옥을 설계할 때의 일이다. 문손잡이 하나도 회장님 컨펌을 받아야 하는 기업의 특징과 무엇을 해도 지어지는 순간 불만이 쏟아질 거란 각오가 필요한 사옥 설계의 콜라보를 가열차게 경험했다. 물론 시간은 흐르고 일은 되는 것이 섭리이기 때문에 회장님 접견실을 수시로 드나들며 몇 달간의 지난한 피드백 과정을 거치니 건물의 규모와 형태가 거의 다 확정되는 기본설계 완료 시점이 도래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규모가 작고 디자인에 특화된 회사였기에 건축주와 설계 초기단계인 기본설계까지 계약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컨셉 디자인과 기본적인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를 대형 설계사무실에 넘기기만 하면 일이 끝나는 수순이었다. 마감을 하고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놀 생각에 들떠 있던 그 순간, 디자인 회의에 ‘지관(地官)¹'이라는 직업을 가진 분이 등장했다.
그분은 건물의 설계도와 모형을 보자마자 포디움² 위에 측면으로 치우쳐 자리 잡은 타워의 위치가 잘못되었다며, 위치를 중앙으로 옮기고 당초 주출입구를 등지고 있던 엘리베이터 홀을 기운이 통할 수 있도록 평면상 90도 방향으로 회전시키라고 했다. 코어³와 주차장 설계, 타워 위치 변경은 오피스 설계의 기본 골격이기에 그의 말은 몇 달간 진행해 온 결정들을 무산시키는 발언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설계 회의를 진행하며 제안 사항을 건축주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며, 결정을 끌어내는 지난한 과정은 몇 달에 걸쳐 이뤄졌던 것과 달리 지관의 논리는 뜻밖에 속전속결로 설계에 반영되었고, 평면은 지관께서 하명하신 대로 스펙타클하게 변경됐다.
회장님과 지관의 티키타카를 보면서 ‘풍수 이론이 이렇게 강력한 설계 도구가 될 줄 알았다면, 건축사를 따는 대신 지관이 됐을 텐데…’ 라는 푸념도 나왔다. 지관의 말을 착실하게 따라 사옥을 완성한 기업이 이후 얼마나 잘 되었는지는 노코멘트 하겠지만, 한국에서도 이런 에피소드를 종종 듣는데 풍수 이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중국과 홍콩의 경우는 말해 뭐하겠나 싶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홍콩상하이은행은 어떤 식으로 지기가 통하도록 건물을 들어 올렸는지 살펴봤다.
공간을 들어 올려 기둥이 없는 건물을 설계하다
실제로 가보니 건물을 들어 올렸다는 공간감은 꽤 그럴싸했다. ‘진짜 기둥이 하나도 없네?’라는 말을 중얼대며 기둥 없이 비워진 1층 필로티(건물 1층을 비워둔 구조로 일반적으로 기둥만 있음. 주차장, 보행로, 공용공간 등으로 활용) 공간을 지나 약간 사선 방향으로 비틀어 배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1~2층을 연결하는 이 에스컬레이터도 기운이 일직선으로 흘러 들어오면 부정하다고 여겨 살짝 비틀어 배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운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직각으로만 움직이는 건가 보다.

기둥 없는 1층 필로티 공간에 사선으로 배치된 에스컬레이터 ⓒ 포스터 앤 파트너스 홈페이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진입하는 장면을 건물 안에서 바라본 모습 ⓒ최차장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진입하는 장면을 진입 방향에서 바라본 모습 ⓒ최차장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 경험도 신기했다. 얇고 투명한 곤충의 번데기를 뚫고 속을 관찰하니, 몸통은 없고 껍질만 남은 느낌이랄까. 실내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대공간이었고 기둥 하나 없이 엄청난 층수의 아트리움(건물 내부에 위치한 탁 트인 공간. 자연채광이 들어오는 실내 광장 또는 중정(中庭)으로 이해할 수 있음) 위로 유리지붕이 덮여 있었다. 은행 건물의 보안 중요성을 고려해 오픈된 벽과 천장만 촬영이 허용됐기에 건물에서 받았던 느낌을 사진으로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7개 층의 중앙이 개방되어있는 아트리움 ⓒ최차장
미쳤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뻥 뚫린 아트리움을 한참 고개를 들고 올려보다가 ‘아니, 이 건물은 대체 밟고 올라설 바닥이 있긴 한 거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비일상적인 공간감과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구조만 놀라운 것이 아니라, 기준층 평면도 놀라움의 연속이다. 가운데 오픈공간이 있는 층은 코어랑 코어 전면부 복도를 빼면 남는 공간이 별로 없는 느낌이라 오픈공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오픈공간은 층별 구획이 안 되어 있고, 외부에서 1층 실내로 진입하는 부분의 경계도 에어커튼으로 되어있어 관리비 부담도 엄청날 거 같다. 많은 홍콩의 건물들이 에너지 사용을 좀 과격하게 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특히 이 건물은 지을 때도 많은 돈이 들었지만 짓고 나서도 돈을 많이 먹는 냉방괴물 같은 느낌이다.

아트리움이 있는 기준층 평면도 ⓒ포스터 앤 파트너스 홈페이지
이렇게 가운데가 뚫린 도넛 모양의 평면을 1985년에 수용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요즘에야 수평적인 조직문화와 맞물려 자유로운 평면도 납득이 되지만, 1985년 당시에는 이런 형태의 평면 구조로 위계를 갖춘 오피스 레이아웃을 짜기 어려웠을 것이란 생각에 더 대단하게 느꼈던 것 같다. 자료를 찾다가 마치 ‘난 다 알고 있었지’라는 얼굴 표정으로 “홍콩상하이은행 건물은 지어진 지 40년이 되었는데, 이런 평면 구조가 유동적인 조직 구조에 더욱 적합하게 잘 사용되고 있답니다”라고 인터뷰하는 노먼 포스터 경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결단을 내린 건축주와 그 요구를 풀어낸 건축가의 만남은 40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유효한 세기의 만남이었던 셈이다.
좋은 건축물의 탄생 조건은 무엇일까?
자, 글의 서두에 던졌던 화성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홍콩상하이은행 건물을 보면서 상상해 본다. 만약 화성에 건축물을 처음 짓고자 하는 건축주(하얀 얼굴에 돈 많은 그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건물을 디자인하고 공간을 계획하며 설계 도면을 그려 안전하게 짓는 전체 과정을 조율해줄 건축가를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1985년 홍콩상하이은행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포스터 앤 파트너스에 한 표를 던질거 같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도시에 화성 신축 프로젝트처럼 거대한 목적과 꿈을 가진 건축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건축주가 아파트를 짓고 싶을 때, 판매시설을 만들고 싶을 때, 오피스나 개인주택을 지을 때 찾는 건축가는 대부분 다를 것이다. 무조건 규모가 크고 유명세를 가진 건축가가 진행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설계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건축주가 가진 꿈의 크기와 목적에 맞는, 혹은 숨겨진 목적까지도 발굴해 낼 수 있는 건축가를 만나야 비로소 좋은 건축물이 탄생하는 것 같다.
건축가도 마찬가지이다. 건축주 없이는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기 어렵다. 그러니 꿈의 크기가 클수록 어마어마한 꿈을 가진 건축주를 만나고 싶어 할 것이다. “너는 어떠니?”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저를 찾아만 주신다면, 고객님의 꿈의 크기에 맞게 제 꿈도 고무줄처럼 맞춰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할지 모르지만, 건축가와 건축주 환상의 궁합을 위해 건축주의 목적을 결과로 실현 가능한 건축가를 찾는 일에 경험과 직관을 총동원할 것이다.
홍콩상하이은행 건물을 만들어 낸 건축가와 건축주의 세기의 만남이 내가 사는 도시에서도 자주 일어나길 바라며, 다음 편에서도 건축주와 건축가의 ‘환상’ 또는 ‘환장’의 궁합으로 만들어낸 건물을 찾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