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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를 좀 풀자면, 나는 십여 년간 몇 개의 건축사 사무소를 다니다가 최근 5년간은 시행사와 자산운용사에 근무했다. 어느 곳에서든 매해 연말마다 "올해보다 더 힘든 적은 없었고, 내년에는 더 큰 위기가 온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었다. 지나고 보면 그때가 비교적 좋은 시절이었던 경우도 있어서 억울한 마음이 드는데, 따져 물을 타이밍을 매번 놓치고 있는 중이다. 지난 연말에도 역시나 고강도의 위기설이 돌았고, 12월에 이직까지 한 터라 새해부터 올해 쓸 배터리가 3% 정도 남은 느낌이었다. 이럴 땐 남들이 한다는 호캉스로 충전을 해봐야겠다며, 2025년 여름에 오픈한 신라모노그램 강릉을 예약했다.

서울 강동구에 사는 나에게 동해에 면한 도시들은 꽤 가까운 느낌이라, 신라모노그램이 있는 강릉 역시 가뿐하게 도착했다. 순수한 휴식을 위해 죽은 듯이 누워만 있으려 했던 것도 잠시. 강릉에 도착하니 중앙시장도 가보고 싶고, 새로 생긴 호텔도 구석구석 탐방하고 싶어졌다. 호텔과 레지던스의 부대시설과 로비는 각각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계는 누가 했는지, 운영은 어디서 맡았는지도 궁금해졌다. 평면도를 찾아보고 건축물대장까지 떼어보고 나니, 결과적으로 다시 생산자의 눈으로 돌아온 듯했다. 조금 피곤해진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소득이 있었다. 뜻밖의 흥미로운 건물을 하나 발견한 것이다. 신라모노그램과 함께 개발된 '더 그로브 테이블'이라는 상업시설이다. 

신라모노그램에서 내려다본 더 그로브 테이블 ⓒ최차장

 

공간요소의 전시장 vs 이렇게 만들어도 돼?


더 그로브 테이블은 신라모노그램과 함께 이스턴투자개발, 태영건설, 우미건설 등이 지분 투자한 디오션259PFV㈜가 시행하고, 태영건설이 시공하였다. 신라모노그램에서 더 그로브 테이블을 내려다보면 콘크리트 평지붕의 별다른 표정이 없는 건물로, 얼핏 설비 관련 시설처럼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분동형 건물이 중앙의 공간을 감싸고 있는 형태다.

주동인 신라모노그램보다 부속동인 더 그로브 테이블에 만듦새와 공간적 이야깃거리가 많아 보여 성의를 가지고 자세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건물에 마치 아돌프 로스1가 범죄라고 이야기한 장식적인 요소 없이, 벽과 기둥과 슬라브만으로 공간을 풍부해 보이게 하는 요소를 모아놓은 전시장 같았기 때문이다. 옥상정원과 외부 계단, 중정, 조경 공간을 돌아서 진입하도록 설계된 2층의 일식집, 작은 중정을 감싸는 회랑, 슬라브가 오픈 된 내부를 향한 발코니, 계단을 통한 연출, 노출 콘크리트 중단열 벽으로 톱니 모양을 구현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더 그로브 테이블의 다양한 공간요소들 ⓒ최차장

본 연재의 3편에서 다룬 홍콩 퍼시픽 플레이스가 촉각적인 디테일을 가미한 물성에 집중했다면, 이 건물은 콘크리트 덩어리로 공간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요소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대형 호텔과 함께 개발되는 상업시설임에도 공용부 비율이 꽤 높다. 공간적 재미를 주는 요소들을 끝까지 지켜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런 요소들이 많다 보니, 한편으로는 헤이리와 파주 출판단지를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건물을 본다기보다 박람회 같은 건축의 장면들을 보는 것 같았다. 약 20년 전 그것들을 설계했던 당시 주류 건축가들이 다시 나타나 그때의 방식으로 만지작댄 느낌이다. 개발사업에서 최소 기능 외의 요소로 비용이 증가되는 일을 할 때마다 구구절절 건축주를 설득해온 습관 탓인지, 건축가의 자의성에 의해 도출된 공간을 보면 '와, 이렇게 했네?'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 오히려 실무를 오래 한 대형 설계사무소의 작업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공간을 소비하고 즐기는 사람으로서는 마냥 즐거운 일이지만, 실무를 어떤 과정으로 풀어냈을지 궁금해졌다.

 

필드 위의 선수들


이 프로젝트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니 건축물대장상에는 설계자가 희림건축이라고 되어있었고, 몇 개의 기사에서는 설계자를 테라로사 창립자 김용덕 공동대표로 소개하고 있었다.2

프로젝트에 참여한 관계자들을 통해 이 프로젝트의 업무 구도와 실제 업무가 진행된 과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현재 마카랩의 공동대표인 김용덕 대표의 역할은 건축 설계자라기보다 전체 방향을 제시하는 데 가까웠다. 초기에는 섬처럼 흩어져 있는 건물을 종합하여 사각의 중정형 배치를 하고,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중앙에 수공간을 두는 전체적인 배치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이러한 방향을 실제 공간으로 빚어낸 것은 JSA건축 정승환 소장의 몫이었다. 정승환 소장은 테라로사와 몇 차례의 협업을 거친 인연으로 이 프로젝트에 합류했으며, 컨셉 디자인에서 시작해 이 프로젝트의 설계의도 구현 감리까지 맡았다. 방향으로 제시된 아이디어를 공간으로 풀어내고, 그것을 도면으로 완성하고, 시공 현장에서 의도대로 구현되는지까지 확인한 셈이다. 설계에서 가장 힘든 일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현실의 법규와 공사비 안에서 살아남도록 끝까지 지켜내는 일이다.

마카랩은 또 한 축으로 테넌트 유치와 운영을 맡았다. 공동대표인 안혜주 대표는 AIG코리안부동산 개발 전무를 거쳐 IFC서울 리테일 자산관리를 총괄한 경력이 있다.3 운영을 담당할 회사가 착공 전부터 합류하게 된 덕분에, 만드는 일과 사용하는 일이 따로 놀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이 프로젝트의 의미 있는 지점이다. 상업시설은 테넌트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몇 수를 내다봐야 한다. 이 공간만의 특징을 살리는 일은 감각과 균형이 동시에 요구된다. 마지막에 결정되는 테넌트에 맞춰 필요한 기능을 뒤늦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필요해질 기능을 미리 예상하며 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급자 중심의 설계가 되어 공간이 평범하게 흘러가고, 가성비가 우선시되면서 미래 운영에 필요한 요소를 놓치기 쉽다.

실시설계 및 인허가 일정에 맞춰 시공사가 현장에 투입되기 전까지 공사 도면을 완성하는 마지막 주자는 희림건축 호텔 본부다. 프로젝트 전 과정에 참여한 고예린 선임을 통해, 프로젝트 진행 상황과 분야별 실무자와의 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내용을 다 담아낼 수 없지만, 내가 많다고 느꼈던 공간 요소는 설계상으로는 더 다양했으며, 의도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만족스러웠던 부분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각 동을 의도적으로 연결하지 않았나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공사비 이슈로 브릿지는 제외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호흡이 긴 건축물을 만드는 일, 그중에서도 건축 설계 과정을 단순화해 설명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설계 과정은 컨셉을 잡고 프로그램을 구성하며 공사 도면을 그리는 선형적 과정이기도 하지만, 축구팀처럼 포메이션4을 짜서 적절한 시점에 투입과 교체를 하기도 하고, 세부 업무들이 분화되었다가 중첩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림 1] 선형의 다이어그램
[그림 2] 분화된 다이어그램

건물의 규모가 작고 건설 시장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기획·설계·감리까지 모두 건축사사무소에서 담당하던 일이었다. [그림1] 그러나 부동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제도와 전문 영역이 세분화되었고, 그 결과 컨설팅과 용도별 특화 설계, 단계별 설계 분리, 법정 감리, 설계의도구현 감리, 운영사의 설계 참여 등 설계 과정에 여러 회사가 관여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림2]

하지만 현실의 프로젝트는 다이어그램처럼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선수들이 대기하다가 순서에 맞춰 필드로 등장하는 식도 아니다. 서로 간섭하고 업무 경계는 밀리고 당겨지기를 반복하며, 일은 겹치고 순환한다.

 

포메이션 짜기


이 개발의 메인은 연면적 약 3만 3천 평 규모의 신라모노그램이고, 더 그로브 테이블은 그에 부속된 약 2,400평 규모의 건물이다. 비교적 크지 않은 공간에 기량 좋은 선수들을 모아, 숫자로 보여지는 사업성을 뽑아내는 데 매몰되지 않고, 매력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 더 집중한 프로젝트로 보였다. 작년 여름에 오픈했지만 강릉의 단수 이슈를 겪으며 11월부터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많은 임차인과 상업시설들이 그 시간을 버텨냈고, 그 고비를 넘긴 뒤 올해 1월에 방문했기에 처음으로 온전히 작동하는 이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실무를 주도한 이스턴투자개발은 물리적인 건물을 설계하고 완성하는 선형의 프로세스에 머물지 않았다. 강릉에서 호텔 이용객을 위한 상업시설을 구상하며, 앞서 언급한 실무진처럼 각 역할에 맞는 선수들을 기용했다. 특히 운영이 설계 과정에 개입하는 순환형 프로세스를 가능하게 한 점이 눈에 띈다. 그리고 비교적 작은 공간이지만 운영과 함께 설계의도 구현 감리를 지정하고, 의도를 구현하고자 할 부분에 비용과 힘을 실어준 건축주의 리드 역시 이 프로젝트에서 유효했다고 본다.

대지의 특성을 잘 반영한 공간을 구상하고 구현하려는 목표, 관광객에게도 유효한 시설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목표, 인허가 승인과 완성도 있는 시공도면을 만들어야 하는 설계자들의  각각의 목표가 맞물리고 달성된 결과, 사용자의 흥미를 끌고 다시 찾고 싶어지는 공간이 된 것 같다.

 

미드필더9로 뛰는 선수, 기용하는 감독


최근 서울에서는 다양한 대규모 복합 개발사업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대형 프로젝트는 이제 아파트처럼 건설사 주도의 소품종 대량 생산 방식보다는, 점점 건물을 정교하게 다듬는 여러 손길이 필요한 다품종 소량 생산 방식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 결과 본문에서 언급한 다이어그램보다 훨씬 복잡한 업무 구도가 형성된다. 

설계자의 입장에서 보면, 건축 설계는 단계별로 세분화되고, 다시 또 경계가 흐려진다. 단단한 고체처럼 일하기보다는, 액체처럼 분화된 일들의 틈새를 메우거나,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변화하는 의도를 끝까지 쫓는 성실과 전문성을 요구받는다.

구직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건축학과 졸업생이 실제 건축 설계사 수요에 비해 넘치는 국내 상황10에서, 전통적인 건축 설계 외에도 그 사이사이의 전문성을 채워가는 역할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설계사무소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만나면, 건축사사무소가 아닌 자산운용사에 다니는 나에게 건축’계’를 떠난 거냐고 묻기도 한다. 건축계가 다른 은하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건물을 짓는 일을 떠난 적이 없다고 속으로 생각하다 말곤 한다. 설계 도면 밖에서도 건물을 만드는 일은 꽤 많다.

대형 복합개발의 설계를 관리하는 건축주 입장에서 보면 해외사 경쟁 설계, 총괄 건축가, 특화 설계(단위 세대·상업시설 등), 인테리어, 각종 영향평가와 심의를 거치며 구현하고자 하는 공간을 만들어 간다.  그래서인지 ‘핸들링’이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밀당과 저글링도 피할 수 없다. 일이 분화되고 전문성이 강화될수록 그 경계에 놓인 일들에 대한 책임을 눈에 불을 켜고 챙기고, 더 적정한 선수들을 기용해야 한다는 자각도 커진다.

다양한 프로젝트로 고군분투 중인 정승환 소장과 이 프로젝트 외에도 복잡해진 설계 시장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여러 분야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정작 건물이 망가지는 경우가 생기고, 이를 막기 위해 끝까지 설계 의도를 지켜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단단함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설계자든 건축주든 어느 하나 관계가 단순해지는 법이 없다는 생각에 피로감이 슬며시 올라오기도 했다. 그래도 신라모노그램 호캉스에서 체력적인 충전 대신 하나는 분명히 챙겨왔다. 좋은 공간 뒤에는 언제나 반드시 보이지 않는 선수들과, 그들을 기용하는 감독이 있다는 사실이다.

 


[1]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1908년 발표한 에세이 「장식과 범죄」에서 건축과 공예에서의 장식을 문명의 퇴보로 규정하며 근대 건축의 기능주의적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강릉신라모노그램 ‘더그로브테이블’, 호텔·레지던스 결합한 새로운 상업시설로 주목 - 테넌트뉴스 https://tnnews.co.kr/archives/253938 
[3] 식탁 너머의 이야기, 더 그로브 테이블 - 메종코리아
https://www.maisonkorea.com/food/2025/09/%EC%8B%9D%ED%83%81-%EB%84%88%EB%A8%B8%EC%9D%98-%EC%9D%B4%EC%95%BC%EA%B8%B0
[4] 포메이션(Formation): 축구에서 선수들을 공격과 수비 역할에 따라 배치하는 방식. 4-3-3, 4-4-2 등 숫자로 표기하며, 팀의 전술적 구조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복합 개발사업의 역할 분담 구조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5] CD(Concept Design): 설계의 초기 단계로, 건물의 전체적인 컨셉과 방향을 설정하는 단계. 공간 구성, 매스 형태, 주요 동선 등 큰 그림을 잡는 작업이다.
[6] SD(Schematic Design): 기본 설계 단계. CD에서 설정한 컨셉을 바탕으로 평면, 입면, 단면 등 구체적인 설계안을 발전시키는 단계다.
[7] DD(Design Development): 실시설계 전 단계로, SD에서 발전된 설계안을 더욱 구체화하여 구조, 설비, 마감재 등 각 분야와 조율하며 설계를 완성해 나가는 단계다.
[8] Cdoc(Construction Documentation): 공사 도면 작성 단계. 시공사가 실제로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모든 도면과 시방서를 완성하는 최종 설계 단계다.
[9] 미드필더(Midfielder): 축구에서 공격과 수비 사이를 잇는 포지션. 골을 넣는 공격수나 막는 수비수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경기의 흐름을 조율하는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10] <요즈음건축 2.0> 국형걸, ‘탈건의 시대’ 내용 참고
최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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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차장

건축사 최차장은 10년 동안 건축설계를 하며 건축주의 의도를 읽지 못해 혼란을 겪었다. 최근 4년 동안은 시행사에서 건축주 대변인으로 활동 중인데, 의도를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언젠가 본인의 프로젝트에 활용하고자 여러 도시와 지역을 돌아다니며 건물의 목적값 구현 과정을 상상하고, 그 해석 내용을 글로 풀어낸다.